
제 얘기 한번 들어 보실래요? 제가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다니까요. 해인사에서요.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못 믿으시겠어요? 그럼 제 얘기 정말 들어보실래요?
80년대 후반이니까 벌써 20년 가까이 됐네요. 서른 살도 안 된 총각시절 얘기죠. 절친한 친구 모친상을 당해 부산에 갔어요. 겨울이었어요. 상가에서 하루 보내고 다음날 함께 간 친구들과 해운대 바닷가를 걸었답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오랜만의 부산 나들이가 더 설레었는지도 몰라요. 친구 모친상이 일종의 핑계가 된 거라 할까요?
겨울답지 않게 햇빛이 따사롭고 날씨가 좋았어요. 제가 당시 즐겨 입던 검은색 외투를 휘날리며 햇빛과 바다, 겨울바람을 즐겼답니다. 최성수의 ‘남남’을 콧노래로 불렀어요.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가 오늘밤 내 곁에서 떠나갔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있잖아요. 폼 좀 잡은 거지요. 어쨌든 기분 좋았어요. 부산 아가씨들이 흘깃흘깃 나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구요.
그래서 제 여행이 시작됐어요. 친구들은 서울로 가고 전 혼자 좀더 여행을 하겠다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어요. 목적지도 없이 혼자 떠나는 여행. 좋잖아요. 어디로 갈까 버스 시간표를 살피다 진주행이 눈에 띄었어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대학 시절 숱하게 불렀던 진주난봉가의 도시. 남강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더라구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점점 더 혼자만의 여행에 빠져들었어요. 왠지 고독해지는 것도 같고, 그리 심각하지 않은 고민거리도 꽤나 절실한 사색의 대상인 양 가슴에 사무치기도 했어요. 무슨 고민거리였냐구요? 물론 생각도 나지 않아요.
처음 가본 도시 진주. 제겐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남강은 마치 조그마한 도랑물 같고, 물빛은 녹색인데 예쁜 녹색이 아니라 오염의 상징인 녹색이었어요. 요즘은 좀 깨끗하고 넓어졌는지 모르겠네요. 진주성벽도 별로 볼 게 없었고, 박물관인가도 들어가 봤는데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심 거리를 가득 메우고 즐비하게 늘어선 술집 분위기가 너무 후졌어요. 어디 가 한잔 해야지 하는 생각에 술집들을 기웃거렸는데 하나같이 조그맣고, 테이블이며 의자며 시설이 형편없더라구요. 게다가 더더욱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술집이 당시 유행하던 생맥주를 파는 집이었는데, 아 글쎄 이른바 ‘매미집’이라는 사실이었어요. 생맥주 파는 ‘매미집’. 혼자만의 여행에 여자 생각도 나긴 했지만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더라구요. 돈도 별로 없었구요.
남강가 포장마차 식의 장어구이 집에 갔어요. 소주를 마시다 옆자리에서 혼자 술 먹던 사람과 합석을 했지요. 함께 몇 잔 주고 받다 계산을 하려 하는데, 엉뚱하게도 이 사람이 자기 술값을 제게 덮어씌우려 하는 거예요. 매몰차게 거절하고 나왔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강가까지 따라 나와 몇 마디 주고 받더니만 냅따 제 배를 주먹으로 치고 도망가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참 기분 더럽더라구요.
낭패감에 혼자 좀더 거닐다보니 은근히 화도 나고, 혼자 여행의 설렘도 사라져 버리고, 술기운은 좀 돌고, 하여간 뒤죽박죽이었어요. 후진 ‘매미집’이지만 술 한잔 더 먹고 여자나 꼬실까 하는 생각에 다시 도심 술집거리로 갔지요. 하지만 또 다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고 들어가진 못했어요. 돈이 걱정돼 그랬는지, 아직 어려서 용기가 나지 않아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쏘다니기만 하다 여관방 잡고 잤지요.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어요. 진주가 싫더라구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해인사행 버스였어요. 물론 초행이었지요. 원래 거리가 먼 건지, 길이 나빠 많이 막혀 그런 건지, 게다가 그 시절 시외버스가 다 그렇듯이 정류장마다 한 30분씩 섰다가 가는데 정말 오래 걸리더라구요. 아무리 자다 깨도 끝이 없고 지루함의 극치를 맛본 것 같아요. 도착하니 초저녁이긴 해도 짧은 겨울해가 지고 깜깜했어요.
아마도 해인사 입구 관광객들을 위한 여관촌이었겠지요. 깜깜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한겨울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거의 없고, 주변엔 여관과 밥집, 기념품 파는 집들뿐이었어요. 그 오랜 시간을 들여 내가 여기 왜 왔나 저절로 한심해지더군요.
배가 고프니 밥은 먹어야 했지요. 비슷비슷한 식당 중 한 곳에서 소주 마시며 밥을 먹었어요. 그런데도 시간은 아마 얼마 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냥 자긴 뭣하고 어디 갈 만한 곳도 없고 난감하더군요. 오늘밤은 용기를 내 봐야지 하고 찾아봤지만 여자 나오는 술집은 눈 씻고 찾아도 없더군요. 원래 그런 건지 여행철이 아니라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아 글쎄 당구장에 가서 혼자 당구를 쳤답니다. 잘 치는 당구도 아니에요. 초보 실력인데 혼자 당구장에 들어가 당구를 쳤다니까요.
혼자 여행. 부산을 거쳐 진주를 거쳐 해인사로. 얼핏 보면 폼 나는 스케줄 아니에요? 근데 혼자 당구나 치고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웃기시죠? 고민거리, 사색은 어디 갔냐구요? 저도 몰라요. 그냥 뒤죽박죽 엉망진창의 기분이었어요.
여관은 깔끔하더라구요. 잘 잤어요.
그런데 역사는 밤에 이루어졌어요. 아무도 모르게 말이에요.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었죠. 세상이 온통 새하얀 눈천지였어요. 족히 20cm는 넘게 흰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니까요. 게다가 눈은 그쳤고 날씨도 좋았어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어요. 함박웃음이 지어졌어요. 마구 엉클어졌던 머리도 마음도 깨끗해졌어요. 그냥 기분 좋았어요.
세상에. 여러분 같으면 안 그랬겠어요? 밤에 잠들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글쎄 거짓말처럼 밤새 눈 내려 세상을 덮고, 신기하게도 다시 해는 반짝거리고 있으니 말이에요.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쳐 가며 해인사로 향했지요. 꽤 먼 거리였지만 기분 좋았어요. 벙긋벙긋 웃음도 나구요. 경내 풍경도 참 멋지더군요. 구경 잘 했어요. 좋은 기분으로 서울로 돌아왔지요.
여러분 제가 본 그날 그 흰 눈이 부처님 아닐까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여러분도 부처님 만나시려면 해인사에 가세요. 온갖 잡생각, 낭패감, 뒤죽박죽 엉망진창일 때 해인사로 떠나세요. 제겐 흰 눈으로 부처님이 오셨지만 여러분껜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몰라요. 잘 찾아 보세요. 분명히 오신다니까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