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예수도 집안 땅을 찾아서-산성자산성의 무덤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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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숨결과 풍정 - 이호신
1995년 06월 160호
집안 수도의 마지막 요새인 환도산성에 오르기 전 날 밤, 나는 또 하나의 감격으로 밤을 설쳤다. 광개토왕릉비 다음의 장군총 탐방에서 그림 때문에 일행과 떨어진 시간에 장군총 위에서 비디오로 풍경을 담던 신형식교수(이화여대 사학과)와 마주쳤다. 신교수는 몇 해 전(1993년) ‘아! 고구려ꡑ전(조선일보주최)의 산파역을 맡은 장본인으로 연변대학 교환 교수로 있으면서 이 일을 성사시킨 분이다.
첫 만남이었지만 신교수는 나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고, 나는 내친김에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집안의 풍경 가운데에 장엄한 대국의 상정인 ꡐ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무덤 떼’를 꼭 스케치북에 담고 싶어서 거리와 위치를 물었더니 자세하게 일러주며, 지금 서두르면 해가 넘어가기 전에 당도할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개인 시간을 낼 틈도 나지 않고 일행과의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되겠기에 나는 그 길로 안내를 맡은 조선족 아가씨에게 내 입장을 밝히고 숙소에 이르자마자 저녁 식사를 포기하고 인력거를 빌렸다.
늦은 시간 산길이 험하다며 조선족 아가씨는 나를 한족 청년 조씨에게 소상히 설명하면서 꼭 숙소까지 다시 와야 한다고 일렀다. 나는 먼저 청년에게 협조를 부탁하며 인민폐 이십 원을 주고 인력거를 샀다. 하지만 구닥다리 자전거 인력거를 맨발 슬리퍼로 끌며 비포장을 달리는 청년의 새까만 맨살과 등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안쓰러워 차마 앉아서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일몰이 다가오는 시간이라 잠시도 지체할 수 없어 조씨는 빈 수레를 끌고, 나는 산길을 걸어서 갔다. 신교수가 일러 준대로 통구천에 거의 이르러 강을 건너기 전 오른쪽 산으로 기어오르자 기력이 다하고 숨이 차올라 의식마저 가물가물해 왔다. 그러나 산정에 올라 내려다 본 산성자산성의 위용과 아래 무덤 떼의 장관은 실로 웅대한 대국의 물결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산성 아래에서 통구천의 너른 옥수수밭에 널브러진 수많은 석총과 토총은 교과서 도판으로 보았던 실제 현장이요 까마득하게 동경하던 세계라서 한동안 시야가 막막해 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는 숨막히던 가슴이 열리고 눈물이 나며 알 수 없는 미망의 숨결이 내 가슴에 요동쳤다. 일몰이 지난 어둠에도 불구하고 스케치북을 펼쳐 그림을 그리고 산을 내려온 그 날 밤은 천 년 전의 환상에 사로잡혀 잠을 설쳤다.
ꡐ소생지산성ꡑ 의 장관은 실로 유장한 역사의 함축이요, 말없는 웅변으로서 고구려 민족의 타고난 대륙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요, 인류사적 보고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누구든지 산성에 오르면 그 경이에 찬 장관에 감읍하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의 물결은 파고가 높은 만큼 상흔의 깊이도 더한 법인지, 이 엄청난 역사의 무덤을 대대손손 지키지 못한 채 적에게 밀려 환도산성의 옹성 위로 밀려 남으로써 무덤에 가해진 도굴과 만행은 또 어떠했으랴. 흩어지고 허물어진 조상의 무덤 앞에서 통곡의 울음소리 또한 깊었을 것이다.
이 같은 무덤 떼를 천수백 년이 지난 몇 해 전(1993년) 집안시에서 새로이 단장했다고 하녀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인공에 가해진 모양새가 마음에 걸린다.
이 글을 쓰는 시간, 징군총과 같은 이곳 방단方壇 묘탑이 한반도로 건너와 서울 방이동 백제고분과 안동 석탑동의 안동탑, 그리고 의성 석탑동의 의성탑으로 이어지고, 또 다시 일본의 대판太除과 강산현 縣에서 같은 형식의 대규모 석탑 및 토탑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고구려의 숨결이 이렇듯 곳곳에 스며 있건만 그 날의 영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이 곳에서만은 대륙을 기상으로 말달리던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현장의 유물이란 지난 역사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며 복원해 볼 수 있는 상징이요, 증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