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생명의 씨알을 일깨우는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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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며 - 장원
1995년 06월 160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다를 것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목적이 다양할수록 세상은 풍부해진다. 그러나 누구나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의 씨알이다.
이 생명의 씨알 없이 추구되는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풍부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 생명의 씨알은 삶의 중심이요, 궁극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생명의 씨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자연 속에 있을 때이다. 그 순간은 생각 없이 평화로움이요, 사랑이라는 말없이 사랑 그 자체가 된다. 자연은 우리에게 단순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의 씨알을 일깨우는 살아있는 스승이다. 이는 자연 스스로가 생명의 씨알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자연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자연은 근원은 생명의 씨알이라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본디 자연이란 하늘, 땅, 식물, 동물, 인간에 서로 응하고 공명하는 거대한 전일적, 유기체적 생명공동체다. 우주자연의 생명성은 이러한 내적 통일성과 상호연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화이트 헤드나 성 프란시스의 자연철학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에 예속된 대상이 아니라 그 자제로서 영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며, 스스로 자기의 존재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주ꡑ 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의 반 생태적사고(때문에 자연은 기껏해야 인간의 생활을 지탱하는 도구 또는 보조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그 결과로 비참하게 파헤쳐져서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무지와 그로 말미암아 생긴 올바르지 못한 삶의
양태, 다시 말해 인간의 폭력적인 대량생산 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살인적인 소비 문화가 자연 파괴의 근원이다.
이러한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교육’과 ‘신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고도로 산업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계
산하는 사유ꡑ만이 존재하고 ‘성찰하며 침잠하는 사유ꡑ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근본 이유라 할 수 있다.
‘성찰하며 침잠하는 사유’ 란 정서적인 감정을 중심으로 하되, 하나의 표상에 외곬으로 집착하여 일반적으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는 마음이다. 자연 훼손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과 새 사장을 꽃피워 낼 씨앗은 ‘성찰하며 침잠하는 사유’ 에 있다. 이는 어린 시절의 자연 교육, 질 좋은 자연 환경에서 자라난 유년 시절의 경험, 그리고 신앙을 통한 부처님에의 온전한 의지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
자연 사랑은 개개인에게 곧 생활이어야 하며 바로 신앙 그 자체여야 한다. 그리고 불교인들은 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수도사적 실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 공동체 안에서 길러지고 축적된 경험과 지혜 그리고 사랑을 세속 세계에 나누어야한다. 왜냐면 부처님은 사찰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입김, 생명의 능력으로 밖의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생명체마다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자연사랑의 첫걸음이다.
자연 속에서 지연의 원리가 곧 우주의 질서임을 깨달아 거기에 거스르지 않고 사는 삶, 이러한 생태학적 윤리와 신앙은 지연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자연과 다르지 않다는 생태적 사고에 의해 바로 세워질 수 있다.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의 고침 없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 훼손과 환경 오염이 극에 달한 지금, 인간은 그 자체로 생명이며 우주인 자연에 대해 새로운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만물이 하나에서 나누어 하나로 돌아가는 우주의 법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과 자연은 하나이며, 한 어머니의 딸이다. 자연과 공생하는 지혜와 자연에 대한 외경으로 말미암아 ‘자연’처럼 ‘절로 그렇게’ 부처님 안에서 살아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