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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영취산 통도사(하)-금강계단이 마련된 적멸보궁과 자장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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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06월 160호
이태호.황호균

적멸보궁론에 입각한 금강계단
이처럼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금강계단의 석종을 들어내어 사리를 친견하려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 첫 번째는 고려 초이다. 「삼국유사」의 ꡐ전후소장사리ꡑ 조에 따르면 일연스님은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ꡒ옛날 본조 本朝의 두 안렴사按蘭使가 와서 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 뚜껑을 들고 들여다보니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 속에 있는 것을,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부터는 이 돌 뚜껑을 감히 들어보지 못했다.”라고 기록했다. 안렴사는 고려때 지방관으로 대체로 초기의 관직으로 여겨진다. 이후 일연스님 당시인 광종22년(1235)은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때인데 상징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은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할 때 절에 와서 왕이 준 신표인 부절을 들이대고 군사를 시켜 돌 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 작은 돌 함 속에는 유리통에 들어 있고 유리통속에 사리만 네 알이 있었다고 한다. 유리통에 금이 가서 유공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시주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가 된다. 이후 몽고에게 항복한 1264년에 원나라 왕실과 고려 왕실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와서 그 돌 함에 예배드리고 사방의의 운수승들이 몰려와서 참배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도사에는 다른 절에 없는 전각 이름이 있는데 이는 황화각으로 왕실사람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또한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것 같다. 원나라에 머물 던 인도사람인 지공스님 같은 이조차도 금강산 법기도량에 참배하는 것과 금강계단의 사리와 부처님의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는 1326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에 머물면서 계를 설하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모셔진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은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을 가져왔다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 목판본이 통도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생계경」이란 ꡒ모든 중생이 유무와 성상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한다는 법리를 증득할수있다”는 내용이다. 지공은 나옹 혜근에게 영향을 주어 침체되어 가는 고려 불교에 활력을 준 스님으로 원나라에서는 달마스님처럼 높이 모셨다고 한다. 그들 사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최상승무생계법ꡑ 은 공의 입장에서 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반야의 이치에 따라 공의 도리를 체득하여 걸림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다.
하지만 고려 말기에 와셔 계단은 큰 수난을 받게 된다. 이 때는 고려의 국력이 쇠약할지는 틈을 탄 왜구가 삼남 해안지역을 노략질 할 때이다. 당시 통도사 주지 스님이었던 월송月松 대사는 우왕3년(1377)에 왜적이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깊이 감추어 두었고, 다시 1379년에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월송 대사는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 나와 경성까지 올라와야 했다. 이색이 지은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기」에 그 때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계단의 수난은 여전하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계단은 또 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을 탈취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옥백 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자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십일 년 뒤인 선조36(1603)사명 대사 유정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함에 넣어 은사인 금강산의 휴정 대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스님은 ꡒ영남이 침해 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 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취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 라고 하면서 한 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함은 태백산 갈반지에 봉안하게 했다. 이 갈반지는 오늘날의 정암사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연유로 정암사가 5대 적멸보궁에 들어간 것이다.
이후 금강계단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명 대사가 휴정 대사의 명을 받아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뒤 1652년에 정인 스님의 주도로 중수를 했고, 1705년에 계파성능스님에 의해 다시 중수되었다. 그 뒤 영조와 순조 대에도 거듭 중수를 하였다. 이 가운데 숙종 31년인 1705년 계파스님에 의한 계단중수는 그 본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대대적인 공사인 듯하다. 이 때 사리와 가사를 세 함에 나누어 봉안하였는데 3색 사리 네 매를 한 함에, 또 한 함에 불아를, 마지막 함에는 정골 수십편과 비라금정가사 및 패엽경문을 안치 하였으며 개석을 덮은 뒤 그 위에 연화석을 놓고 석종을 올려 놓았으며 사방과 네 모서리에 팔부중상을 세웠다고 한다. 1911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기술로 축대를 쌓고 석책을 계단 주위에 두르고 문비를 세운 것을 제외하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숙종31년 계파성능스님에 의해 중수된 18세기 초의 모습일 것이다.
금강계단이 18세기 이전에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지는 능묘처럼 꾸며진 것은 성리학의 이념 가운데 효사상에 입각한 조상숭배가 절대적 가치를 부여받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현상이라는 최완수 선생의 지적은 계단 앞의 대웅전이 능묘 앞에 지은 정자각과 그 기본을 같이 한다는 설명과 함께 적절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다만 대웅전의 경우 능묘 앞의 정자각에서만 그 유래를 찾을 것이 아니라 통일 신라 말과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진 선승들의 부도와 탑의 뒤편에 건립한 영각들에서도 그러한 풍습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바로 이 점이 조선시대의 능묘 앞에 짓는 정자각 같은 모습의 전각을 절 집의 중심 법당으로 삼을 수 있게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고려시대는 통도사의 금강계단에 모셔진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에 대해 왕실에서뿐만 아니라 외국 스님들 조차조도 참배를 소원하는 둥 진신사리 신앙이 무척 성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후 고려 말의 왜구와 조선 임진왜란 때의 왜적에게 사리와 영골을 탈취 당하는 수난을 겪다가 17세기 이후에는 금강계단을 중수하는 일이 빈번하게 된다. 이는 아마 침략자들이 사리를 꺼내는 과정에서 금강계단의 파손을 자행하자 이를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하게 된 것일 게다.
하지만 위의 기록 가운데 일연스님 당시인 1235년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계단의 돌뚜껑을 들어내 보았을 때는 유리통에 사리뿐이었다고 하는데, 그 뒤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인 지공스님이 1326년 고려에 와서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참배하면서 부처님의 사리 외에 가사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그 뒤 기록에 사백여 년 동안, 금강계단의 기록에 가사가 등장하지 않다가 1705년 계파 스님에 의한 계단중수 때 비라금점가사를 봉안했다고 하는 점도 의문이다. 더구나 사리의 개수도 후대의 기록일수록 더 많아지는 기 현상을 보인다.
일연스님 당시인 1235년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계단의 돌 뚜껑을 들어내 보았을 때는 유리통에 사리가 네 알뿐이었는데 그 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빼앗겼을 때와 백옥 거사가 다시 찾아올 때는 사리 외에 영골이 더 등장한다. 이어 사명 대사유청스님이 금강산의 휴정 대사에게 보낸 두개의 사리함가운데 하나가 봉판되다가 마지막으로 1705년 계파스님에 의한 계단중수 때 3색 사리 네 매와 불아 그리고 정골 수십편, 비라금점가사, 패엽
경문을 세 개의함에 나누어 안치하였다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진신사리가 분멸하여 늘어난 이적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속인의 잣대로는 도저히 분간키 어려운 일이다.

통일신라 시대 유적과 유물
통도사의 문화재는 국가지정과 도지정을 포함하면 모두 마흔 네 점에 이른다. 그야말로 성보의 보고인 셈이다. 국가지정은 보물 열한 점과 무형문화재 한 분이고 도지정은 유형문화재 서른 한 점과 문화재자료 한 점이다.
그 가운데 조선 후기인 17세기 이후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여 제 모습을 잃어버린 금강계단을 제외하고 통일신라시대로 올려 볼 수 있는 유물은 금동아미타삼존불상, 금동여래입상, 금동보살상 상체편, 폐사지 폐탑재가 있다.
금동아미타삼존불상은 최근에 공개된 불상으로 학자에 따라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그 중요성을 높이 명가하기도하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그런 금동불이다. 이미 이 금동불장반 가지고 학술대회도 개최하였고 조사보고서도 세상에 나왔다.
금동여래입상은 높이가3.5센티미터에 달하고 육계가 유난히 큰 편이다. 금도금이 일부 남아 있고 수연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이다. 가사가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이며 옷주름이 아래로 U자형을 이루며 처져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양식상 통일신라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금동보잘상 상체편은 불에 녹아버린 탓인지 지금은 허리 윗부분만 남아 있다. 남은 높이는6.5센티미터이고 보관이 높다랗고 원만상의 도톰한 얼굴과 섬세하게 조각된 목걸이 둥의 조각 수법을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기단부에 사리공을 마련한 폐탑재가 영산전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기슭 폐사칙에 놓여 있는데 통도사의 초창기를 규명해 볼 수 있는 자료로 주목된다.
통도사에서 보관되어진 이러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유물들이 관연 통도사에서 조성되어졌는지는 의문이다. 금동여래입상 및 금동보잘상 상체편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소지불 같은 호신불이어서 이동이 자유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유적과 유물
통도사의 문화재 가운데 금강계단과 이동하기 쉬운 금동불보살상들을 제외하고 가장 시대가 앞 선 것은1085년(선종 2)에 건립했다는 확실한 기록을 가진 극락전 앞의 배례석(태강 11년 을축2월)과 국장생석표(태안 원년 을축 12월)이며 삼층석탑과 봉발탑(용화전 초칭이 1369년)도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고려 선종연간에 이루어진 불사에 대한 자세한 문헌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밖에도 고려 중기에는 청동 은입사 향완이, 말기에는 관음전 앞 석동, 봉발대,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1386년), 청동 소탑, 청동요령, 청동은입사정병, 화엄경 변상도가 만들어진다.
이 가운데 흔히들 봉발탑이라 부르는 돌로 만든 바루는 석등과 거의 같은 구조의 대석 위에 뚜껑이 덮인 큰 돌바루를 얹고 있는 희귀한 석조물이다. 통도사의 석조 봉발대를 보면 지금까지 용도를 알 수 없었던 김제 금산사의 노주도 아마 이러한 봉발대처럼 돌바루가 위에 얹혀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봉발대를 통도사에서는 석호 또는 의발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용화전 앞에 세우게 된 데에는 신앙상의 뜻이 깃 든 듯하다. 불가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정표로 가사와 바루를 주는데, 아마 그러한 의미에서 통도사의 석조 봉발대는 부처의 의발을 용화전의 주불인 미륵보살이 이어받은 것을 상징화한 조형물로 만들어진 것이지 않을까 여겨진다.
또 통도사의 동남쪽 2킬로미터 지점 국도변에 자리한 절의 경계표지로서의 국장생 석표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에 따르면 절의 둘레가 사만칠천 보가 되는데 사방 산천의 비보를 위하여 열두 곳에 각각 장생표를 세웠다는 것 가운데에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장생표이다. 통도사의 장생은 경계표와 비보의 구실을 동시에 한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국장생 석표는 경남 밀양군 무안면 무안리의 장생과 경남 울산군 삼남면 상천리의 장생 및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입구의 장생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밀양과 울산의 장생은 통도사장생과 같은 해인 1085년에, 도갑사의 장생은 오년 뒤인 1090년에 세워졌다.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
지금까지 살펴 본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문화재들을 맨 나머지는 모두 조선시대 임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불화는 삼백 여 점에 달해 그야말로 불화의 보고라 이름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불이문不二門 편액은 송나라 미불의 필적이며 금강계단金剛械擾과 영취산靈鷹山 통도사通度寺는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 國之大剩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고 만세루 현판은 여섯 살짜리 신동이 썼다고 절에서 전한다.
이 밖에도 자장암 마애삼존불상 (1896년)과 개산조당 앞에는 1920년에 만들어 세운 오층석탑이 있다. 또 하나의 빼 놓을 수 없는 유물은 통도사의 역사를 기록한 사적기인데 한말의 승려 서해담이 찬술하였다. 권두에 장지연이 발문을 쓴 1권 1책의 필사본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중국에서 귀국한 이래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불사리를 안치하게 된 유래를 설명하였다. 사리에 얽힌 영험의 사례와 보수기록 등을 상세하게 언급하였으며, 통도사의 가람 배치가 상, 중, 하의 삼단 배열을 가지게 된 유래와 그 구조를 언급하였다. 또 절에서 전해 오는 각종 보물의 명칭과 종류를 기록하였는데, 은입사향로 등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마지막 부분에는 산 내의 암자를 언급하면서, 그 위치와 창건 및 중수연대를 기록하였다. 「삼국유사」등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보초 자료의 활용 등이 돋보이며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절 집을 나서면서 꼭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일은 성보박물관의 활동상이다. 그 동안 불화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불교 문화재 관련 도록을 펴내는 의욕적인 활동을 하여 왔는데 이는 다른 절 집들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일로서 모든 절의 귀감이 될 만하다. 통도사를 연재하는 동안 적멸보궁론의 실체에 대해서 줄곧 생각해 보았다. 흔히들 적멸보궁이라 부르는 곳이 경상도와 강원도지역에만 있다는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이마도 이러한 지역의 편중성은 적멸보궁론의 창시자격인 지장스님이 신라 진골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선덕여왕 때의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해되어진다.
삼국이 서로 다투어 땅 뺏기를 하는 전쟁기에 적멸보궁론에 입각한 진신시리 신앙이 신라 지역에만 널리 유포된 것은 어쩌면 곧 선덕여왕이 신라 군사력의 약세를 지장스님이 제창한 적멸보궁론이라는 불교의 힘으로 정면 돌파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등장한 것이 않일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적멸보궁론은 종교가 정치에 이용되는 역사의 보편적인 양상으로 그저 친견하는 공덕만 쌓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요즘 다시 배제하려는 차에 자칫 신비화로 치닿게 된다면 우리 불교의 신앙체계가 저급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함께 해본다. 또 하나 답사기를 시작하면서 화두처럼 들어보았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친히 입으셨다는 가사와 진신사리 문제는 글쓴이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음을 밝혀둔다. 해체하여 보면 속 시원히 알 수 있는 일이나 그 뒷감당도 걱정이고 하여튼 지금 절에서 말하는 석가세존이 친히 입으셨다는 가사는 기록과 다르다는 점만을 밝힐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붉은 바탕에 금점이 찍혀진 가사라고 적고 있는데 반해 사찰측에서 공개한 가사는 황금색 바탕에 모서리 일부에 당초문 같은 문양을 붉은 수로 놓은 것이다. 1705년인 숙종 31년 중수공사 때 이미 재빛으로 변했다는 가사를 다시 봉안했는데 그 뒤 이를 들어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어떤 연유로 가사가 다시 금강계단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 세존 친착가사에 대해 진위 문제에 집착하여 야단스럽게 소리내기보다는 예수의 성의 같은 종교적인 신앙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차피 한정된 진신사리에 얽매이기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인 무한 법사리를 존중하는 그런 신앙으로 나아갈 때 우리 불교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