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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 수구암 성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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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06월 160호
경기도 파주에 있는 보광사를 찾기는 어렵잖았으나, 막상 그 곳에 이르러 부속 암자인 수구암을 아는 이는 금방 만날 수가 없었다. 절 입구에 늘어선 꾸밈새 요란한 밥집들의 사멸을 받으며 잠깐 올라가지니 , 평일인데도 뒷산인 고령산을 쓰다듬으며 흘러 내려온 약수를 담아가려는 흰 플라스틱 물통부대의 행렬과 심심찮게 마주쳤는데도, 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멈추기까지 안내 팻말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ꡒ보광사․에서 한 삼, 사백 미터쯤만 올라오시면 됩니다.ꡓ
성일스님이 그렇게 일러주셨것다.
길이 있음 직한 곳을 다시금 눈여겨보니 ,왼쪽으로 급히 휘어져난 길 초입의 콘크리트바닥에 ꡒ수구암->ꡑ이라는 글귀가 누워 있었다. 차가 오르기는 다소 가풀막져 보이는 그 길은 들어서니 제법 따가워진 햇살을 가리는 그늘이 시원했다.
ꡒ오솔길이었는데 오륙 년 전에 심심파적으로 혼자 닦아 넓혔지요.
한두 해쯤 걸렸나? 그래도 나무 한 그루 안 잘라냈어요. 큰 돌은 포크레인 써서 들어내고-
갑갑하여 어디를 가고 싶으면 그 일로 시간을 죽이면서 마음을 눌렀다. 그리고 밤에는 늦도록 시를 썼다. 성일스님이 시를 쓴지는 꽤 오래된다.
스무 살 무렵에 송광사에서 수계한 뒤 경전을 한 해쯤 보고, 선방에서 몇 철안거한 뒤에 혼자외진 곳으로 떠돌면서부터였으니 한 스무 해쯤 되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ꡐ낮은 곳으로 눈물로 흐르는ꡑ 물처럼, 그의 떠남은 늘 호주머니 속에 상비되어 있었던 만큼, 그의 그러한 성정과 지금까지의 이력으로 보아 그의 시심의 발아는 출가 무렵부터로 되짚어 보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스님처럼 “큰 진리를 깨닫고자”랄지 “간절한 마음에서ꡓ랄지 그럴 듯한 계기도 없었다. 그저 “배추 속잎 같은 시절ꡓ에 속향인 대전에서 가까운 갑사를 가끔씩 들르다가 십이월 어느 날 문득 결행한 일이었다.
자신을 등 떠민 것이 무엇이었는지 구태여 찾아보자니 , 일몰 무렵 일정한 시각에 울리던 범종소리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그 무엇을 붙잡아서 밑바닥까지 확인해 보려는 깨끗하고 정중한 욕심ꡓ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지어 보았지만 사문의 첫 관문인 행자생활은 고되었다. 풀 센 바지의 서슬에 속설이 쓸리고, 온 산 다니며 나물 캐고, 불때서 밥하고 큰 방걸레질한 다음 뒷걸음질 쳐서 제 발자국까지 지워 내고, 한사람이 잘못하면 대중이 모두 함께 참회하고 ․․․매 맞고 … .
스님으로서의 한평생 삶의 절반고생을 행자시절에 겪는다. 한 고참 스님들의 말씀도 별로 의지가 못 되었다. 한곳에 오래 뿌리 내리지 못 하는 그의 삶은 출가 때처럼 번번이 설명되기는 힘들었다. 큰방을 걸레질하다 갑자기 복받치는 마음이 있어 밤중에 걸망을 지고 나오다-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송광사도 그렇게 해서 떠났다. “삼일수하”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한자리에서 오래 머물러 있을 때 생길 법한 집착을 경계하라는 뜻일 터이나, 예민한 감성줄을 타고 난 성일스님에게는 필연적인 삶의 형태에 해당하는 말이 되었다. 걸레질하다 복받쳐 챙겨 든 걸망을 부린 곳은 송광사에서 머잖은 화엄사였는데, 그 때에 사미승이던 종태스님과 함께 섬진강에서 미역을 감던 도반하나가 익사했다. 또랑또랑하여 죽음이라는 음습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그 도반은 이틀이 지난 뒤에 섬진강
하구에서 발견되었는데 , 그 일은 그에게 깊은 상채기가 되어 그를 뒤혼들었다-그 일이 있은지 스무 해가 넘은 뒤에 똑같은 장소에서 종 태스님을 다비했다.
그는 그 혼들림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조금씩 입(立) 문자하기 시작했다. 지대방에서 엎드려 책을 보거나 시를 긁적이다가 혼이 나는 일이 그의 일상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몇 철은 선방에 방부를 들였지만, “나름대로의 참선 방식ꡓ을 찾고야 만다. 승랍 스무 다섯 해 가운데 다섯 해쯤은 차를 탔다면 열 해쯤은 두 다리로 걸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평택의 어느 절에서 묵을 때인데, 주지 스님이 신발을 사왔다. 보아하니 자신이 신을 것과는 달리 대중들이 신을 신발은 폐타이어로 만든 조악한 것이었다. 뒤바뀐 경우 아니냐고 “객승주제에ꡓ 따지다가 다툼이 되어 또 걸망을 졌다. 짙어 가는 가을 산의 날망을 넘어서니 눈물이 나왔다.
그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수원까지 내처 걸었다. 그렇게 살고, 그렇게 걸어다녔다. 자신이 떠돌던 숱한 절 가운데서도 그는 유독 춘천 청평사를 잊지 못한다. 78년도, “적성에 안 맞는ꡓ 총무원 교무국장 소임을 일고 여덟 달쯤 하다가 그만두고 그 길로 들어가 일 년 반쯤 살던 곳이었다.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아, 그 호수도 그 배도 온전히 제 것이었다. 배에서 내려서도 일 킬로미터쯤 걸어야 했고, 터는 넓으나 피폐된 본절에서도 꽤 떨어진 토굴까지 이어지는 계곡은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겨울 한밤중의 설해목소리도, 새벽에 일어나 눈 위에 남겨진 짐승 발자국을 찾는 일도 그만의 것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시와 소설을 쓰는,ꡐ깃털이 같은ꡑ 두 스님 함께 머물면서 언 눈을 녹여 밥을 지어먹으며 시를 썼다. 드물게 찾아든 등산객이 놓고 간 불전으로 도반스님과 함께 춘천으로 나가 자장면 한 그릇씩 사먹고 목욕탕을 들르는 것이 유일한 호사였던 그 시절, 그 시절에 그는 꿈속에서 맞닥뜨린 기막힌 시구에 환호작약했다.
그러나 깨어나면 끝내 시구는 떠오르지 않아 안타까워하다가 다시 촛불 한 자루 켜 놓고 그 허망한 심사를 그러모으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가「사람이 그리운 날」이라는 제목의 첫 개인 시집을 펴낸 것은 81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ꡒ시 아닌 시들”로서 “애리애리한 감상의 편린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라 해도 그에게는 미몽의 세월을 한 매듭짓는다는 개인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그 이전에 이미
그는 현대시학자를 통해 전봉건 씨로부터 시 추천 완료를 받았고(78년),불교신문의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된 ꡐ기성시인’의 몸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2년 1월, ‘江가에 앉아서ꡑ 로
한국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었다.
84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 「산가山歌」를 펴냈다. 두 번째 시집에 묶인 시들을 두고 고은씨는 ꡒ그의 시는 본질적이다. 그리고 사물의 진수를 재생시키고 있다. 서정과 인식의 동화적 숨결이 그의 시심이다. 나는 그의 시를 읽고 나서 이 세상을 또 하나 보았다.”고 극찬했다. 그 시집 속에는 책 제목으로 삼은 「산가」의 연작시말고도, 짧은 석 줄 시가 마흔 편쯤 실려 있으니 , 아마도그 형식과 내용의 절묘한 조화, 어쩌면 선회輝畵 같은 그 노작들에 대한 헌사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이렇게 읊었다.
ꡐ미처 감추지 못한/쓰다 둔/몇 줄 편지’
(「노을」). “애기 부처님이 거처를 나와/개울물에 발씻으시고/옷 벗고 앉으셨다” (「봄」), “집 나온 병아리들이/하얀 옷 노란 옷자랑을 하며/종알종알 놀고 있다ꡑ (「햇볕」), “강 건너에 산 너머에/애인을 하나씩 두고/양달로 응달로 살아가는 난봉꾼ꡓ (「언어」),
그 무렵 그는 부산한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80년대 초부터 그와 함께 진관, 청화, 현담, 자명 , 청원스님 들어 주축이 되어 승려시 낭송회를 열어서 사부대중과 만났으니 , 조계사의 문화회관에 많으면 칠팔백 명의 청중이 모이기도 했다. 그 무렵 시 낭송회 바람이 불면서 지방 원정과 함께 공간사랑이나 대학교에서도 그를 불러 시를 옮게 했으니 , 독자들은 시인의
얼굴과 육성을 만나고, 초대된 시인은 독자들과 시종일관 뜨겁게 밀착되는 기회가 되어 준 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가벼운 호주머니를 털어 팜플렛 제작비용에 보태는 일도 마지않던 스님들과 이른바 이념적인 갈등이 생기면서 84년도에 49회로 시 낭송회는 막을 내렸다. 그 일을 두고 이념이나 사상이나 인정 人情에서 출발해야지 , 그것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고서는 흙이 없는 곳에 씨앗을-뿌리는 것과도 같다ꡓ고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지난해 교단과 세간을 뜨겁게 달구였던 개혁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말석을 지키고” 관여했던 만큼 ꡒ종단개혁ꡓ에 대한지지는 남다른 것이었다. 누가 봉행위원(준비위원)으로 그의 이름을 올려놨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일본에 계시는 서옹 큰스님을 증명證明으로 모시기도 하고, 도반들과 밤을 함께 지새며 토론하고, 밤샘하는 도반들 지어먹일 쌀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대중들을 동원하는 등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나 앞자리에 서지는 않았다. ꡒ그저 줄 끄트머리에 서서 앞에 가는 사람바라 보고 싶었을 뿐ꡑ이었다. 언젠가 그는 “자는 자기를 세워야 될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기 위한 무릎 꿇고 올리는 기도ꡓ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84년에 김지하씨가 「마침내 시인이여」라는 17인 시집에서 ‘다라니ꡑ 라는 담시 형태의 시를 발표하자 성일스님은 ”불교계 전반에 대해 선동적인 비방행위를 하는 것ꡓ이라고 판단하여 불교신문에 반박시를 실어 그에 맞섰다. 그 뒤로 서울의 중앙지를 비롯하여 지방지에서도 이에 관한 기사를 싣는가 하면, 발행처인ꡐ창작과 비평ꡑ 사에서 입장 해명서를 발표 한 달쯤에 걸쳐 큰 논란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김씨와 출판사 쪽의 공개 사과를 고집하다가 ꡒ대승심ꡓ을 발휘하라는 원로 스님들의 고견을 받들어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소신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판단되면 ꡐ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그의 일면을 드러낸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김지하씨가 부르짖는 생명사상의 근간도불교의 화엄사상이 아니던가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은 천착도 모르는 바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반박시 이후에 발표한글에서ꡐ지성인과 시인에게 자식과 재산은.... 오직 자기의 안쪽으로만 열렬하게 향하는 건강한 절조”라야 하며 , “당장하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 같더라도 눌러 저장하며 두었다가 사람들이 “목마르고 서러울 때 청정수가 될ꡓ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한 것은, 자신이나 또 이 땅의 모든 수행자들이 견지해야 할 기본 태도로 당부하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세수 마흔 다섯, 한 십 년 넘게 그는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동국대학교 철학교육과 대학원 과정을 끝내기도하고, 부처의 일생을 그린 노랫말을 지어 큰 무대 위에 올려 보기도 하고, 시낭송회를 비롯한 여러 기회를 통해 많은 시인들과도 교유해 보고, 문단의 직책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자신이 ‘혈류血流ꡑ라 말한 그 시절부터 모든 것들을 또 다시 떠내려 보내면서 자신에게 더 깊이 침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들판에 선 소나무 한그루가 지우는 그늘에 달빛을 더욱 환하게 해 준다고 믿는 사람이다. 시가 말씀 ‘언’변에 절 ‘사’자가 덧붙어 이루어진 말인 만큼 삶이나 예술의 한가운데에 불佛이 자리하고 있다고 의혹 없이 믿는 사람이다. “수준높은ꡓ사회과학쪽 책에 깊이 경도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수시로 책방에 들러 쏟아져 나오는 시집을 즐겨 읽을 뿐이다. 그러나 그게 또 다 그렇고 그런 것 같고, 그런 느낌은 자신이 읊은 시처럼 ,
“아무리 새 것이라도 / 나이론 천은 좋은 걸레가 될 수 없느니라던 / 어머님 말씀을 껴안으며 / 토요일 중간쯤 / 예식장 앞을 지나다가 / 사정없이 죄송하여라 / 머리 깎은 / 생명 하나ꡓ (「봄편지」전문)라는 깊은 자책감으로 이어져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그가 퇴락한 까치암에 지나지 않던 이 곳 수구암에 머물게 된 지는 일곱 해쯤 된다. 떠돌아다니던 발길을 멈추고 맘 놓고 시나 좀 쓸까 하고 나무 때서 혼자 밥해 먹으며 깃을 들였던 곳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비를 가리지도 못하는 형편을 두고 볼 수 없어 큰절 주지 노릇하는 도반들의
도움과 반연의 힘으로 법당 하나를 지었다. 두세 해에 걸친 불사가 끝난 것은 지난93년 봄인데도 단청 없는 법당 안은 아직 향그러운 나무 냄새가 떠돌고 있었고, 천장높이에 비하면 애기 같은 부처 한 분이 모셔져 있을 따름이었다. 두어 채 요사채도 지어 비닐 하우스신세도 좀 면하고 싶지만 인연 닿는 대로 해 갈 생각이다.
우선은 자신의 말처럼 “정신병자처럼 한곳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주지는 평생 안 하고 지낼 요량입니다. 뭘 갖게 되면 애착이 생기면서 힘이 약해지는 법이지요. 내 절이 있다. 나를 지지하는 단체가 있다. 이런 생각다 없애야죠. 후련하게 벗어던진 뒤라야 힘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꾸려 나가기는 얼마나 고단한가. “그럴듯한” 큰스님밑의 촉망 받는 제자로서, 목청 높은 단체의 양양한 지도자로서 지내기가 훨씬 더 수월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빗소리마저 반갑고, 오래 소식 끊고 지내다 들른 도반은 더욱 반가운 나날을 지내며, 비닐 하우스로 요사채 밖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몸을 적시며 혼자 시를 쓰는 삶을 꾸려 나가기가어디 쉬운 일인가.
올 가을쯤에 묶어 선보일 세 번째 개인 시집과 산문집 준비로 동그랗게 탈모증이 생긴 머리를 푸른 빵떡 모자로 슬며시 가리고 법당 뒤에 자라는 보리자 나무밑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하루세 끼 먹기 고단한” 나날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수구암守口菴 장꽝 옆에 흐드러진 홍도화 빛깔의 관계 또는 그 상징을 곰곰이 따져 본다. 성일스님은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