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사람이 그리운 날」이라는 제목의 첫 개인 시집을 펴낸 것은 81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ꡒ시 아닌 시들”로서 “애리애리한 감상의 편린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라 해도 그에게는 미몽의 세월을 한 매듭짓는다는 개인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그 이전에 이미
그는 현대시학자를 통해 전봉건 씨로부터 시 추천 완료를 받았고(78년),불교신문의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된 ꡐ기성시인’의 몸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2년 1월, ‘江가에 앉아서ꡑ 로
한국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었다.
84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 「산가山歌」를 펴냈다. 두 번째 시집에 묶인 시들을 두고 고은씨는 ꡒ그의 시는 본질적이다. 그리고 사물의 진수를 재생시키고 있다. 서정과 인식의 동화적 숨결이 그의 시심이다. 나는 그의 시를 읽고 나서 이 세상을 또 하나 보았다.”고 극찬했다. 그 시집 속에는 책 제목으로 삼은 「산가」의 연작시말고도, 짧은 석 줄 시가 마흔 편쯤 실려 있으니 , 아마도그 형식과 내용의 절묘한 조화, 어쩌면 선회輝畵 같은 그 노작들에 대한 헌사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이렇게 읊었다.
ꡐ미처 감추지 못한/쓰다 둔/몇 줄 편지’
(「노을」). “애기 부처님이 거처를 나와/개울물에 발씻으시고/옷 벗고 앉으셨다” (「봄」), “집 나온 병아리들이/하얀 옷 노란 옷자랑을 하며/종알종알 놀고 있다ꡑ (「햇볕」), “강 건너에 산 너머에/애인을 하나씩 두고/양달로 응달로 살아가는 난봉꾼ꡓ (「언어」),
그 무렵 그는 부산한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80년대 초부터 그와 함께 진관, 청화, 현담, 자명 , 청원스님 들어 주축이 되어 승려시 낭송회를 열어서 사부대중과 만났으니 , 조계사의 문화회관에 많으면 칠팔백 명의 청중이 모이기도 했다. 그 무렵 시 낭송회 바람이 불면서 지방 원정과 함께 공간사랑이나 대학교에서도 그를 불러 시를 옮게 했으니 , 독자들은 시인의
얼굴과 육성을 만나고, 초대된 시인은 독자들과 시종일관 뜨겁게 밀착되는 기회가 되어 준 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가벼운 호주머니를 털어 팜플렛 제작비용에 보태는 일도 마지않던 스님들과 이른바 이념적인 갈등이 생기면서 84년도에 49회로 시 낭송회는 막을 내렸다. 그 일을 두고 이념이나 사상이나 인정 人情에서 출발해야지 , 그것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고서는 흙이 없는 곳에 씨앗을-뿌리는 것과도 같다ꡓ고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지난해 교단과 세간을 뜨겁게 달구였던 개혁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말석을 지키고” 관여했던 만큼 ꡒ종단개혁ꡓ에 대한지지는 남다른 것이었다. 누가 봉행위원(준비위원)으로 그의 이름을 올려놨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일본에 계시는 서옹 큰스님을 증명證明으로 모시기도 하고, 도반들과 밤을 함께 지새며 토론하고, 밤샘하는 도반들 지어먹일 쌀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대중들을 동원하는 등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나 앞자리에 서지는 않았다. ꡒ그저 줄 끄트머리에 서서 앞에 가는 사람바라 보고 싶었을 뿐ꡑ이었다. 언젠가 그는 “자는 자기를 세워야 될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기 위한 무릎 꿇고 올리는 기도ꡓ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84년에 김지하씨가 「마침내 시인이여」라는 17인 시집에서 ‘다라니ꡑ 라는 담시 형태의 시를 발표하자 성일스님은 ”불교계 전반에 대해 선동적인 비방행위를 하는 것ꡓ이라고 판단하여 불교신문에 반박시를 실어 그에 맞섰다. 그 뒤로 서울의 중앙지를 비롯하여 지방지에서도 이에 관한 기사를 싣는가 하면, 발행처인ꡐ창작과 비평ꡑ 사에서 입장 해명서를 발표 한 달쯤에 걸쳐 큰 논란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김씨와 출판사 쪽의 공개 사과를 고집하다가 ꡒ대승심ꡓ을 발휘하라는 원로 스님들의 고견을 받들어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소신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판단되면 ꡐ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그의 일면을 드러낸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김지하씨가 부르짖는 생명사상의 근간도불교의 화엄사상이 아니던가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은 천착도 모르는 바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반박시 이후에 발표한글에서ꡐ지성인과 시인에게 자식과 재산은.... 오직 자기의 안쪽으로만 열렬하게 향하는 건강한 절조”라야 하며 , “당장하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 같더라도 눌러 저장하며 두었다가 사람들이 “목마르고 서러울 때 청정수가 될ꡓ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한 것은, 자신이나 또 이 땅의 모든 수행자들이 견지해야 할 기본 태도로 당부하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세수 마흔 다섯, 한 십 년 넘게 그는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동국대학교 철학교육과 대학원 과정을 끝내기도하고, 부처의 일생을 그린 노랫말을 지어 큰 무대 위에 올려 보기도 하고, 시낭송회를 비롯한 여러 기회를 통해 많은 시인들과도 교유해 보고, 문단의 직책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자신이 ‘혈류血流ꡑ라 말한 그 시절부터 모든 것들을 또 다시 떠내려 보내면서 자신에게 더 깊이 침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들판에 선 소나무 한그루가 지우는 그늘에 달빛을 더욱 환하게 해 준다고 믿는 사람이다. 시가 말씀 ‘언’변에 절 ‘사’자가 덧붙어 이루어진 말인 만큼 삶이나 예술의 한가운데에 불佛이 자리하고 있다고 의혹 없이 믿는 사람이다. “수준높은ꡓ사회과학쪽 책에 깊이 경도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수시로 책방에 들러 쏟아져 나오는 시집을 즐겨 읽을 뿐이다. 그러나 그게 또 다 그렇고 그런 것 같고, 그런 느낌은 자신이 읊은 시처럼 ,
“아무리 새 것이라도 / 나이론 천은 좋은 걸레가 될 수 없느니라던 / 어머님 말씀을 껴안으며 / 토요일 중간쯤 / 예식장 앞을 지나다가 / 사정없이 죄송하여라 / 머리 깎은 / 생명 하나ꡓ (「봄편지」전문)라는 깊은 자책감으로 이어져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다. 그가 퇴락한 까치암에 지나지 않던 이 곳 수구암에 머물게 된 지는 일곱 해쯤 된다. 떠돌아다니던 발길을 멈추고 맘 놓고 시나 좀 쓸까 하고 나무 때서 혼자 밥해 먹으며 깃을 들였던 곳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비를 가리지도 못하는 형편을 두고 볼 수 없어 큰절 주지 노릇하는 도반들의
도움과 반연의 힘으로 법당 하나를 지었다. 두세 해에 걸친 불사가 끝난 것은 지난93년 봄인데도 단청 없는 법당 안은 아직 향그러운 나무 냄새가 떠돌고 있었고, 천장높이에 비하면 애기 같은 부처 한 분이 모셔져 있을 따름이었다. 두어 채 요사채도 지어 비닐 하우스신세도 좀 면하고 싶지만 인연 닿는 대로 해 갈 생각이다.
우선은 자신의 말처럼 “정신병자처럼 한곳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주지는 평생 안 하고 지낼 요량입니다. 뭘 갖게 되면 애착이 생기면서 힘이 약해지는 법이지요. 내 절이 있다. 나를 지지하는 단체가 있다. 이런 생각다 없애야죠. 후련하게 벗어던진 뒤라야 힘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꾸려 나가기는 얼마나 고단한가. “그럴듯한” 큰스님밑의 촉망 받는 제자로서, 목청 높은 단체의 양양한 지도자로서 지내기가 훨씬 더 수월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빗소리마저 반갑고, 오래 소식 끊고 지내다 들른 도반은 더욱 반가운 나날을 지내며, 비닐 하우스로 요사채 밖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몸을 적시며 혼자 시를 쓰는 삶을 꾸려 나가기가어디 쉬운 일인가.
올 가을쯤에 묶어 선보일 세 번째 개인 시집과 산문집 준비로 동그랗게 탈모증이 생긴 머리를 푸른 빵떡 모자로 슬며시 가리고 법당 뒤에 자라는 보리자 나무밑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하루세 끼 먹기 고단한” 나날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수구암守口菴 장꽝 옆에 흐드러진 홍도화 빛깔의 관계 또는 그 상징을 곰곰이 따져 본다. 성일스님은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