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산사의 상념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오성 1995년 06월 160호
처진 어깨를 바로 하려고 도심의 생활을 떠나와서 도량 청소를 하고 난 뒤 차 한 잔으로 맞이하는 산사의 아침은 넉넉함을 가져다 준다. 삶에 찌들은 도시의 부지런과는 다른 산사의 부지런함은 나 자신을 제 삼자로 대하게끔 하는 그만큼의 시간과 공간적 여유를 갖게 한다. 어둠을 쓸어 곱디고운 햇살을 도량으로 맞이하는 아침 청소는 무명의 티끌을 마음의 뜨락에서 쓸어내는 수행의 또 다른 단면이다. 지혜가 깊어질수록 자비심이 깊어져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처럼 산사의 아침은 아리하게 다가온다.
인간의 삶은 지식만으로 얘기될 수 없고 사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둘은 하나라고들 한다. 마음의 활동에서 지성은 아주 얕고 표면적인 역할을 한다. 좀더 깊은 곳에 ‘의지’가 있다. 이때 의지는 타인, 곧 또 다른 나를 향한 간절한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을 때는 인간에 대한 믿음의 등불이 밝아졌을 때이다. 번뇌와 무명의 큰 강은 청정한 마음의 작은 샘물에서 근원한다는 확신은 ‘믿는다’는 말의 모든 것이다. 마음을 청정하게 비우고 맑게 해나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인간을 순수한 그 자체의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화엄경 현수품에 “믿음은 도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산 아래가 시끄럽다. 세상의 살림살이가 나의 수행 도량인지라 먼 발치로나마 힐끔 바라보면 된다. 대구 가스폭발참사의 진상규명과 12.12, 5.18 관련자에 대한 심판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반세기를 넘기고 있는 분단의 장벽을 어떻게 헐어낼 것인지를 놓고 6.27 지자제 선거라는 복선이 깔린 실랑이는 산승의 이름에도 유치함과 안타까움을 교차시키게 한다.
진실을 역사 앞에 발가벗기지 않고, 책임질 자가 책임을 지지 않고, 이를 판명하고 심판할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가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믿음의 대쪽을 부러뜨리지 않게 끔 하는 것은 책임자의 자세에 달려 있다. 책임자가 마음을 비우고 역사 앞에 참으로 진솔하게 참회할 때 이해와 용서가 따른다. 관용을 빙자한 회피는 역사의 정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역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을 밝혀낼 것이며,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이것을 구현하려는 의지를 확인 받는 작업이다. 이를 뭉뚱그려 큰 자비심이라고 했던가.
밤을 새워 이슬을 머금은 계곡 물 요란하고 번잡하지만 맘은 본성을 저버리지 않고 아침으로 흐른다. 사천 왕문을 지나 일주문까지 쓸고 나서 돌아서서 맞이하는 산사의 도랑은 맑은 햇살로 가득하다. 모두가 함께 무명의 티끌을 벗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