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를 뛰어넘는 공부를 하려고 절로 찾아간 것은 마흔이 넘은 후였다. 고향에서 가까운 갑사로 출가했다. 나라를 잃은 고초와 전쟁을 겪고 가족을 잃는 등 만고풍상을 다 겪은 다음이었다. 사람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는 고초를 겪는 데서 도를 얻는 것, 편한 데서는 공부가 익지 않는 법 아닌가.
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출가하겠다고 찾아간 내게 그곳 주지스님이 물었다.
“처사님은 어째서 절에 왔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저, 마음 맑히러 왔습니다.”
내 말을 듣자 내 나이 또래의 주지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오욕락을 가지고 살지만 불법엔 오욕락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실감 있게 들려왔다. 대번에 불법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밝히는 도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다시 주지스님이 말했다.
“그 다음엔 인과법입니다. 자신이 짓는 대로 받는 게 불법이지요.”
내가 묵묵히 듣고 있자 주지스님이 그랬다.
“출가하시겠다면 오늘부터 산에 가서 나무해 나르고 아침저녁으로 마당 쓸고 하세요.”
그날부터 나무해서 담장 밑에 쌓아놓고 싸리나무 베어다가 말려서 비도 만들고 말끔히 도량 청소하면서 늦깎이 행자생활을 했다. 늦은 나이에 출가했어도 빨리 중 되려는 욕심이 없었다. 생사문제를 공부하면 되었지 중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곁에서 수계하라고 채근해도 무려 육 년을 수계를 하지 않고 지냈다. 빗자루 만들고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시간 나면 짬내어 참선했다. 머슴처럼 지내면서 갑사에서 삼 년 살고 칠불암에 가서도 살면서 낮엔 일하고 밤엔 참선했다.
그렇게 불문에 들어와 참선을 하다보니 ‘백사百事가 헛일이구나. 다 꿈속에서 사는 구나…’ 하는 것이 실감되었다. 늦깎이 나의 행자시절은 그걸 거듭거듭 실감한 세월이었다.
올해 내 나이 여든둘, 출가한 지 사십 년이 되었다. 팔십여 년의 세월을 속가에서 반, 출가해서 반 산 셈이다. 생사를 초월하는 공부를 하려고 출가했다고 하니, 누가 묻는다.
“그래, 스님… 생사를 초월하셨습까?”
글쎄, 생사를 초월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늘 편할 걸 보면 그리 잘못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불법은 곧 안심법문安心法問이 아니던가.
지금도 나는 저 행자시절처럼 밭 갈고 농사짓고, 짚신도 삶아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에게 나눠도 주고 밭 갈 때 내가 신기도 한다. 오래 된 철쭉나무를 주어다가 지팡이도 만들어놓고 좌선할 때 쓸 좌대도 만들어놓는다.
가끔씩 어떤 이들이 오두막 토굴에 사는 이 늙은 중에게 와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
그 물음에 내 대답은 한결같다.
“그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놓아버리면 공부 잘하는 겨….”
다 놓아버리면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아닌가. 마음이 비어 있으면 천지도 비는 법인데, 무슨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도는 ‘나’라는 상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밝아지는 것, 그러므로 선禪은 다 놓는 것이다. 이 몸뚱이가 내 것인 줄 알면 아직도 공부를 못한 것이다. 몸뚱이가 내 것인 줄 알면 몸뚱이가 자기 것이 되고 만다. 그러면 죽어도 그 몸뚱이는 자기 것이다. 그래서 몸뚱이를 가지고 윤회한다. 그러나 자성自性은 생사가 없다. 그게 불교다.
지금 나는 고불古佛 한 분과 한 방에 살고 있다. 그는 세상에 ‘무無’ 자 화두를 던진 조주趙州 스님이다. 여든 살이 되어서 주지를 맡은 그는 벽에 걸어놓은 사진에서 내게 말을 건네고 있다.
“한밤중 자시,
마음 경계가 잠시라도 언제 그칠 때가 있었더냐.
생각하니 천하의 출가인 중에
나 같은 주지가 몇이나 있을까.
흙자리 침상에 해진 갈대 돗자리
해묵은 느릅나무 목침에 덮개는 아예 없네.
부처님 전엔 안식향安息香을 사르지 못해
재 속에서 우분牛糞향 냄새만 난다.”
적빈무의赤貧無依를 노래한 그는 날마다 그렇게 나를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