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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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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 - 박재은 2005년 03월 277호
몇 해 전 나는,
암벽 등반을 배우게 되었다.
중력을 타고 내려가는
스키나 스노보드와 같은,
소위 스피드를 즐기는
스포츠와는 달리 중력을 거스르며
억지로 기어올라야 하는 암벽 등반.
체구가 작고, 그에 걸맞게
두 손이 작은 내가 암벽을 타고
오를 때에는 많은 용기와
배짱이 필요했었다.
암벽 틈틈이 포진되어 있는
돌조각을 움켜쥐고 올라야 하는데,
그 돌이 대개 내 손보다 훨씬 커서
미끄러지기 일쑤였기 때문.
한발 한발 위로 오를 때마다
‘손이 시려서 얼고 있는데,
만약 이 돌을 놓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근심이 내 앞에 있었다.
또, 그 근심은 한번 머리에 들어오면
점점 커질 뿐,
암벽을 오르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질 않았고.
결국 근심에 또 근심이 더해져서
내 몸보다 무거워진 마음을
주체 못하고
등반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몸뚱이는 다만 무용지물에 불과
하다는 것을 체험했던 순간이었다.

이후로는 어떤 일에 닥쳤을 때
먼저 마음부터
비우는 버릇이 생겼다.
버릇이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마음부터 비우는
훈련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 과정에서, 천배 삼천배 올렸던
사심 없는 ‘절하기’가
많은 도움을 줬다.
‘건강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더 예뻐지고 싶어요’ 등의
욕심으로 꽉 찬 마음이 백팔 번,
천팔십 번 절을 하면서
점점 ‘무념無念’이 되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경험이 내 직업인
식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강사로, 필자로 또 요리사로
항시 ‘먹을 것’을 논해야 하는
나는 본의 아니게
‘배를 채우는’데에만
중점을 두어왔던 터였다.
마음을 비우는 노력이
생활화되면서부터는
올바른 식생활의 출발은 올바르게
‘속을 비우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5년 이 봄,
봄에 어울리는 음식이나
음료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한다.
“속부터 비우고 오세요”라고
말이다.
묵은 해 동안 꾸역꾸역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을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싹 비워낸 다음,
새봄의 정기와
맛을 넣을 수 있다는 뜻.
그럼, 이제 속을 비워주면서도
영양 손실이 크게 나지 않는
식단 몇 가지를 알아보자.

몸속을 청소해 주는 메뉴
배를 비운다는 것은,
즉 청소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차나 거친 곡물과
같이 위장 벽을 지나면서
정화해줄 음식들이 필요하다.
여기에 다시마나 미역과 같이
섬유질이 풍부한 해조류나
봄나물로 장운동을 돕고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하고,
청국장이나 요구르트와 같은
발효식품으로 소화를 촉진하면
훌륭하게 몸속을 비우게 된다.
일례로 녹차를 이용한 요리가 있다.
체내의 찌꺼기를 쏙 빼주는
녹차는 의외로 응용이 간단하여
불린 쌀과 끓여낸
녹차 죽이나 슴슴히 간하여
쪄낸 녹차 잎 반찬,
또 녹차 가루를 섞은
반죽으로 전병을 부쳐서
야채를 싸먹는
녹차 전병 등은
조금만 머리를 쓰면
쉽게 준비할 수 있겠다.
직장을 쉬는 주말에는 하루나
이틀 내내 녹차 죽에 감식초로
무침 한 미역으로 반찬하고,
은은한 화차로 입가심을 한다.
하루 세끼가 힘들다면
아침과 저녁에 이를 행하고,
점심 한 때에는 청국장찌개나
봄나물밥을 먹어도 좋다.
이 식단을 단 하루,
혹은 이틀만 따라 해보아도
‘몸속을 비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무작정 굶는 단식이나
고역스러운 가루 생식이 아닌,
제대로 요리한 식단이므로
어른부터 아이까지 온 가족이
작심하여 몸속 청소를 해봄직하다.
돌나물이나 녹차 잎에 튀김가루를
입혀 튀긴 후 다진 양파와 식초,
설탕을 요구르트와 섞어서 만든
새콤한 소스를 곁들이면
아이들이 좋아하고,
시중에서 파는 생면 우동에
미역만 첨가하여 끓여도
정장을 돕는 별식이 된다.

마음을 비울수록 풍요로워지는
역설적인 삶에 대하여,
체험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듯
속을 비워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백 마디 말이 무색하다.
외식으로 먹는 맵고 짠 찌개,
5분 만에 먹을 수 있는
기름 덩어리 햄버거,
설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탄산음료가 꽉 들어찬
몸을 비워서 달래며 냉이며
쑥 같은 새 맛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
어떻게 하면 좀더 속을
‘비우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웰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