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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山寺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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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이운규 / EBS 촬영감독 2005년 03월 277호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법주사法住寺의 한 말사末寺인 각연사覺淵寺라는 작은 산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그 이듬해인 1983년 10월까지 절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었는데 돌이켜보면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가장 힘이 들었다는 이유는 인생人生의 타락과 방황의 어두운 굴레에서 양지로 나오려는 자아自我와 이미 몸에 밴 나쁜 타성惰性과의 힘겨운 싸움, 그리고 문명文明을 떠나 전기조차 없는 산사에서 난생 처음 겪어보는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반대로 가장 행복했다는 이유는 혹독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서 경험하게 되었던 자연과의 경이롭고 신비로운 만남 때문이었다.
겨울 내내 군불을 때거나 방에 틀어박혀 독서 등으로 소일거리를 하던 나는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주변을 기웃거리며 여기저기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였는데, 얼음이 녹기 시작한 개울가로 부도가 있던 오솔길 사이로 거북바위가 있던 작은 동산으로 발 가는 대로 이리저리 산책을 하며 다니기 시작하였다. 아직은 새싹 하나 없는 산속의 풍경이고 음지陰地엔 아직 얼음과 눈이 남아 있었지만 뭔가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듯 한 느낌을 갖게 되었던 건 내면적 안정에서 오는 그 어떤 막연한 인생에 대한 희망과 기대 때문이었으리라!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뭔가 대지에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정靜에서 동動으로의 변화인데 처음엔 느낌으로만 감지되었을 뿐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무언가 땅의 느낌이 부드러워지거나 초목草木이 진해 진다거나하는 등의 미세한 변화였다. 이윽고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이름 모를 새싹의 어린잎이었는데. 무슨 야생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냘픈 연초록의 풀이 동토凍土를 뚫고 나오는 그 강렬했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개울가에 가보았더니 중태기(버들치)들도 그 움직임이 비상해졌고 양지녘 물웅덩이엔 어느새 신기하게도 송알송알 개구리 알이 놓여져 있었다. 밤에 비가 왔을 땐 물살에 혹 떠내려가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밤을 지새운 기억도 난다. 일일신日日新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천지만물이 움직이고 있었다. 산길의 양지녘엔 잘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할미꽃도 수줍은 모습을 땅을 향해 감추고 있었고 이윽고 피어나는 바람꽃 꽃다지 냉이꽃 생강나무 개울가의 버들강아지 정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더니 이윽고 온 산에 산벚나무가 만개해 어느덧 온 산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렇게 봄이 오는구나 싶었는데 어느 날 밤새 때늦은 서설瑞雪이 내렸다. 절 주변에 수령이 제법 되는 큰 소나무들이 있었는데 밤새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건 제법 큰 눈이 왔다는 이야기다. 아침에 나가보니 봄은 간데없고 온 산에 다시 겨울이었다. 하지만 계절의 추이推移를 눈 따위가 어찌 막으랴! 해가 비치고 한낮이 되자 그 많던 눈이 녹기 시작하는데 물을 먹은 소나무는 더욱 제 빛깔을 진하게 하여 그 늠름한 자태를 뽐내었고 이 산 저 계곡에서 퍽~ 퍽 거리며 떨어지는 눈덩이들은 가는 겨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으리라! 그 소리는 투박했지만 아름다웠던 봄의 소리였고 나에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봄의 교향시交響詩로 남아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연의 경이로운 모습에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정말 그 봄은 내게 시작되는 인생의 봄과 함께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봄으로 영원히 내 가슴 속에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