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참 더디고 어렵게 온다. 저 강남으로부터 건널 강물이 넓은 것인지, 넘어야 하는 산이 높고 험한 것인지 봄은 이제나 저제나 하는 조바심 저 끝으로부터 온다. 보리菩提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菩提本無樹
맑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本來無一物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앉을까 何處惹塵埃
이와 같은 게송을 들으신 오조 대사는 다음 날 가만히 방앗간에 오셔서 혜능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를 밟는 모습으로 보고 말씀하시길 “도를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하느니라” 하시고, “쌀이 얼마나 익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혜능 조사가 답을 하기를 “쌀은 익은 지 오래이나 키질을 하지 못하였나이다” 대답하니 오조께서 지팡이로 방아 확을 세 번 치고 돌아가셨다. 그날 밤 혜능에게 의발을 전하고 게송으로 그 뜻을 바르게 세워주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뜻이 있는데서 씨가 내리어 有情來下種
원인 되는 곳에 과가 도로 나네 因地果還生
뜻이 없으면 씨도 없나니 無情旣無種
성품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없느니라 無性亦無生
선학先學이 간 길을 보고 후학後學은 그 뜻을 바르게 세운다. 스승은 이때를 맞아 제자를 보호하고 이끌어주니,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인생의 봄에 할 일이다. 이렇게 자라난 싹이 온 세상의 시원한 나무그늘이 되니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그 선禪이며 돈오頓悟의 가르침이다.
양해梁楷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 그림은 육조 혜능 대사가 대나무를 쪼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미 대잎과 잔가지는 대부분 정리되었고, 이제 그 밑둥치부터 한 번에 내리칠 태세이다. 대나무는 한 번에 쪼개진다. 두 번 세 번 내리칠 일이 없다. 한 곳을 베어내리면 담박에 쫙 동서를 달리한다. 대나무를 쪼개는 일이 의심이 단박에 걷히고 바로 깨달음으로 건너가는 그 모습과 같다. 그 갈라지는 모습으로 돈오頓悟를 표현한 것이니 양해의 발상이 참으로 기발하다. 육조대사 옆에는 열 번은 도끼질을 해야 넘어갈 듯한 고목을 비스듬히 그려놓았으니 북쪽 지방의 선법禪法으로 신수神秀대사의 단계적인 깨달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붓질을 감하며 뭉툭하고 거친 붓으로 일관한 그의 표현은 충분히 선의 의미를 담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나 좀더 간결하고 거칠음 속에 있는 부드러움이 한껏 드러난 그의 다른 작품과는 비교되어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육조파경도六祖破鏡圖〉와 한 짝을 이룬 그림이지만 내용과 구도면에서 차이가 있어 혹 명대明代 다시 그려진 모본이 아닌가 의심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모본이라도 그 의미에서는 양해가 전하고자 했던 그 내용에 크게 어긋남이 없으니 진위를 두고 왈가왈부할 만한 것도 아닌 듯싶다.
눈은 밤새껏 내리고 있지만 봄이 올 날도 머지 않았으니 이 눈이 오래 가봐야 얼마나 갈 일이겠는가. 눈 덮인 산야라 하더라도 때늦은 눈발로 경륜을 삼으면 그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