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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때늦은 눈으로 경륜을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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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5년 03월 277호
봄은 참 더디고 어렵게 온다. 저 강남으로부터 건널 강물이 넓은 것인지, 넘어야 하는 산이 높고 험한 것인지 봄은 이제나 저제나 하는 조바심 저 끝으로부터 온다.
올 듯 올 듯 눈이 내리고, 또 올 듯 올 듯 바람이 분다. 마치 의심 많은 아가씨 같아 온다고 하는 제 날짜에 추위와 바람을 한참 흘려놓고야 살포시 눈(目)만 내미는 것이 봄이다. 하지만 한겨울 텅 비고 삭막한 세상에 꽃이 만발하고, 따뜻한 기운이 온 천지를 채워놓는 환희로움은 어느 계절보다 앞서는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 조바심을 충분히 감수할 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겨울이 대지 그 깊은 곳에 무엇인가를 담고 쌓아놓는 시절이라면 봄은 그것을 발산하기를 작정한 시절이다. 한번 오기가 힘들 뿐이지 끝도 없어 보이는 의심 끝에 어느덧 그 두꺼운 얼음장을 밀고 나오는 여린 풀싹들이야말로 봄, 여름과 가을의 결실까지도 그 안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기 몸의 수백 배나 되는 땅을 이고 나오는 어린 싹의 기적처럼 놀라운 것이 봄이다.
주역周易에서는 하늘(重乾天)과 땅(重地坤)이 생겨난 후에 오는 것이 수뢰둔水雷屯()으로 순서를 정하였다. 둔괘屯卦는 괘상卦象으로 보아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땅 속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진동을 하는 모습이니 바야흐로 봄의 기운을 상징한다. 봄은 이처럼 하늘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땅 속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모든 초목과 생명들은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온기에 생명을 의지하여 한 해를 준비한다. 하지만 이때 피어난 작은 싹이 무슨 기운이 있으리오. 가능성은 온 우주를 품고도 남음이 있으나 아직 세상으로 나가기에는 작고 여린 풀일 뿐이다. 그래서 둔屯괘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말고 오직 그 몸가짐과 뜻을 바르게 하여야 하니 군자君子는 이것으로써 경륜經綸을 삼는다고 하였다.
한번 싹을 틔우기가 어려운 일이고 후에는 겨우내 쌓였던 잔설이 녹아내려 내(川)를 이루고 온 천하가 봄볕을 맞는다. 마음 공부도 이와 같아 겨우내 덮여 있던 눈을 녹이는 시간이 많이 들고 또 그 먼지와 더러움을 닦는 노력이 많이 들 뿐이요 의심이 걷히면 그 순간 봄이다.
육조六祖 혜능慧能 선사(638~713)는 선禪을 조금이라도 논하는 사람이라면 법명쯤은 다 아는 분이다. 육조 대사가 오조五祖 홍인弘忍 선사(601~674) 문하에 든 것은 이미 불혹의 나이가 다 되어서이다. 홍인 선사의 수제자였던 신수神秀(?~706)의 게송과 많이 비교하여 소개되고 있는 게송이다. 오랜 기간 수행한 많은 선학에 앞서 의발衣鉢을 물려받은 것은 이와 같은 게송을 내어보인 그의 그릇이었다.

보리菩提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菩提本無樹
맑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本來無一物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앉을까 何處惹塵埃

이와 같은 게송을 들으신 오조 대사는 다음 날 가만히 방앗간에 오셔서 혜능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를 밟는 모습으로 보고 말씀하시길 “도를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하느니라” 하시고, “쌀이 얼마나 익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혜능 조사가 답을 하기를 “쌀은 익은 지 오래이나 키질을 하지 못하였나이다” 대답하니 오조께서 지팡이로 방아 확을 세 번 치고 돌아가셨다. 그날 밤 혜능에게 의발을 전하고 게송으로 그 뜻을 바르게 세워주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뜻이 있는데서 씨가 내리어 有情來下種
원인 되는 곳에 과가 도로 나네 因地果還生
뜻이 없으면 씨도 없나니 無情旣無種
성품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없느니라 無性亦無生

선학先學이 간 길을 보고 후학後學은 그 뜻을 바르게 세운다. 스승은 이때를 맞아 제자를 보호하고 이끌어주니,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인생의 봄에 할 일이다. 이렇게 자라난 싹이 온 세상의 시원한 나무그늘이 되니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그 선禪이며 돈오頓悟의 가르침이다.
양해梁楷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 그림은 육조 혜능 대사가 대나무를 쪼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미 대잎과 잔가지는 대부분 정리되었고, 이제 그 밑둥치부터 한 번에 내리칠 태세이다. 대나무는 한 번에 쪼개진다. 두 번 세 번 내리칠 일이 없다. 한 곳을 베어내리면 담박에 쫙 동서를 달리한다. 대나무를 쪼개는 일이 의심이 단박에 걷히고 바로 깨달음으로 건너가는 그 모습과 같다. 그 갈라지는 모습으로 돈오頓悟를 표현한 것이니 양해의 발상이 참으로 기발하다. 육조대사 옆에는 열 번은 도끼질을 해야 넘어갈 듯한 고목을 비스듬히 그려놓았으니 북쪽 지방의 선법禪法으로 신수神秀대사의 단계적인 깨달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붓질을 감하며 뭉툭하고 거친 붓으로 일관한 그의 표현은 충분히 선의 의미를 담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나 좀더 간결하고 거칠음 속에 있는 부드러움이 한껏 드러난 그의 다른 작품과는 비교되어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육조파경도六祖破鏡圖〉와 한 짝을 이룬 그림이지만 내용과 구도면에서 차이가 있어 혹 명대明代 다시 그려진 모본이 아닌가 의심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모본이라도 그 의미에서는 양해가 전하고자 했던 그 내용에 크게 어긋남이 없으니 진위를 두고 왈가왈부할 만한 것도 아닌 듯싶다.
눈은 밤새껏 내리고 있지만 봄이 올 날도 머지 않았으니 이 눈이 오래 가봐야 얼마나 갈 일이겠는가. 눈 덮인 산야라 하더라도 때늦은 눈발로 경륜을 삼으면 그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