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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머무름 없는 근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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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해인총림 방장 법전 스님 2005년 03월 277호
몰종적沒迹하고
단소식斷消息이여
운무근雲無根이어니
풍하색風何色고
자취가 사라지고
소식이 끊어짐이여
구름은 뿌리가 없거늘
바람에 무슨 빛깔이 있겠는가

법안문익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종무주본從無住本하야 입일체법立一切法이라 하니
여하시무주본如何是無住本이닛고?
머무름 없는 근본에서 일체의 법을 세운다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머무름 없는 근본입니까?”
이에 법안 선사가 대답하였습니다.
“형흥미질形興未質하고 명기미명名起未名이라.
형상은 바탕이 생기기 전에 일어나고, 이름은 이름이 생기기 전에 생겼느니라.”

머무름 없는 근본에서 일체의 법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문수 보살과 유마 거사 사이에 벌어진 유명한 문답입니다.
문수 보살이 유마 거사에게 물었습니다.
“몸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탐욕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탐욕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탐욕은 허망한 분별로 근본을 삼습니다.”
“허망한 분별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전도顚倒된 망상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전도된 망상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머뭄 없음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머뭄 없음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는가?”
“머뭄 없음은 근본이 없습니다. 문수사리여! 머뭄 없는 근본으로부터 모든 법이 세워집니다.”

하지만 이 문답의 마지막에 한 납자가 다시 의심을 일으키면서
법안 선사에게 ‘여하시무주본如何是無住本이닛고’ 하고 묻게 된 것입니다.

법안 선사는 결제기간 동안 이뿐만 아니라 많은 소참문답을 통하여 수없는 납자들을 일깨워줍니다.
“대중이 구름같이 모였으니 스님께서는 대중의 의심을 딱 풀어달라”는 말에는
“요사 안에서도 생각하고 차실 안에서도 헤아려라”고 하여
선실 큰방은 물론 요사 심지어 차실 등 항상 어디서나 정진하는 자세로 살아주길 부탁하였고,
“어떤 것이 사문이 소중히 여길 일이냐”고 물으니
“털끝만큼이라도 소중히 여길 것이 있다면 사문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한마디로 잘라서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백년 묵은 방의 어둠을 등불 하나로 깨뜨린다라고 하니 어떤 것이 한 등불인가?”라는 질문에
“무엇을 백년이라고 하느냐?”고 되물어
그 질문 자체가 가지는 단견短見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었던 것입니다.
“십이시十二時 가운데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걸음걸음마다 내딛는다”라고 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늘 성성적적惺惺寂寂해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은 삼계三界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삼계에서 애착하는 일들을 몽땅 털어버려야 하니 털끝만큼이라도 애착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결제가 덜 끝난 것입니다,
꿈 속에서 화를 내거나 기뻐하는 것은 삼계의 혼침과 산란이며,
또 깨어나서 익숙한 경계라고 정신을 차리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혼침과 산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꿈 속에서 화를 내거나,
깬 후 익숙한 경계라고 소홀히 하는 것 모두 혼란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인들은 이것을 환금幻金 즉 헛것인 금덩이를 끼고 다니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금은 광석 속에 묻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결국 각자가 가진 안목의 문제인 것입니다.
스승이라고 해서 반드시 언제까지나 손을 잡아 이끌어준다는 법이 없고,
대중들도 반드시 그것에 의지해서 가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제는 스승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요, 해제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의지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법안문익 선사 역시 선수善修 홍진洪進 수좌와 더불어 장주州 땅에서
호외湖外지방으로 가는 길에 나한계침 선사를 만났습니다.
“이번 길은 어디로 가려는가?”
“이리저리 행각하려고 합니다.”
“무엇이 행각하는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하니 제대로 알고 있군.”
해제길은 이처럼 가는 곳마다 나의 눈만 밝으면
이렇게 어디서나 선지식을 제대로 만나 점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공부길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법안질명法眼質名’ 공안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법안문익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머무름 없는 근본에서 일체의 법을 세운다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머무름 없는 근본입니까?”라고
물은 것에 대하여 석상초원 선사의 법을 이은 임제종의 장산찬원蔣山贊元 선사는
“머무름 없는 근본으로부터 일체의 법을 세운다고 하니…”라고
크게 말하고는 주장자를 높이 들고서 말했습니다.
“주장자는 머무름 없음의 근본이다.
이 주장자는 아침에 서천西天으로 갔다가 저녁에 당唐나라로 돌아온다.
시방세계를 모두 이 주장자가 세운 것이니 말해보라. 형상 없는 도량도 세울 수 있는가?”

해제대중들이 형상 있는 도량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제대로 주장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입니다. 해제 후의 만행길이 모두 형상 없는 도량입니다.
형상 없는 도량에서 다니는 것 없이 다닐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법안 선사의 뜻이요,
장산 선사의 마음에 계합되는 것이요, 이 산승의 해제법문에 대답하는 일인 것입니다.

찰진도회刹塵道會에
처처보현處處普賢이요
누각문개樓閣門開에
두두미륵頭頭彌勒이로다
티끌세계에서 도와 만나니
곳곳이 보현이요
누각의 문이 열리니
일마다 미륵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