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자는 눈을 뜬 자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5년 06월 160호
고등학교 다니는 조카가 찾아와서 물었다.
ꡒ이모,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는 신이라 보아야 합니까? 인간이라 보아야 합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ꡒ이모가 한번씩 설명해 준 내용을 생각해 보면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도 같지만, 불교가 종교라는 점을 생각하면 설마 인간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신이라 생각하게 되면 인격신을 믿는 기독교나 다른 타종교와 차이가 없어지고…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조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중생 즉 부처’ 라는 것을 생각하면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도 인간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등식을 인정하면서도 의 식 한구석에는 절대자로부터 구원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를 신적인 존재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석가모니의 생애를 설명하면서 특히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잘못된 관념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불교가 종교이면서도 다른 종교와는 달리 교주석가모니가 신이 아닌 이유를 밝히기 위해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 성립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도 예수도 역사상의 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예수는 서른 세 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사흘만에 부활하여 영생을 얻었고, 석가모니는 서른 다섯 살에 깨달음을 얻은 뒤 교화활동을 하다가 여든 살에 열반에 들었음은 그들의 전기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서른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든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든, 이들 두 성인은 일단 인간으로 태어나 중생을 위해 살았으며, 사후에는 차츰 신격화되어 갔다는 점에서 두 종교는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나 신격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경우는 예수의 출현 그 자체에 중점을 두어 예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단 한번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교리가 발달한 반면에, 불교는 석가모니의 출현 그 자체의 특수성이나 역사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 즉 진리를 강조하는 쪽으로 교리가 발달해 갔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간은 결코 예수와 같이 될 수 없음 견주어 불교는 누구라도 이 진리를 깨달으면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에 불교와 기독교의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러면 교리의 발달과정에서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진리에 중점을 두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석가모니는 임종할 때, 후계자를 지목해 줄 것을 기다리는 많은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석가모니를 의지하지 말고 내가 설한 가르침, 곧 법(진리)에 의지하라ꡓ고 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석가모니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므로 의지할 바가 못 되지만, 그가 설한가르침, 곧 법은 만고에 통하는 영원한 진리이므로 이 법을 믿고 의지하라 한 것이다. 여기서 ‘법ꡑ이란 다름 아닌 우주의 돌아가는 이치, 곧 앞으로 설명할 ‘무상의 진리ꡑ 나 ‘인연의 법칙ꡑ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이러한 진리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든 태어나지 않았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진리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잊고 있던 것을 단지 새롭게 자각시켜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ꡓ고 했다. 이런 까닭에서 진리를 깨닫는 자는 모두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된 자이다.
깨달은 자, 부처란 어떤 자일까? 불교에서는 ‘깨달은 자’ 를 다른 말로 ‘눈을 뜬 자’ 라고 한
다. 깨달은 자, 부처를 ‘눈을 뜬 자’ 라 한다면 깨닫지 못한 우리는 장님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장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너무 기뻐서 며칠 동안 법열에 잠겨 있었지만, 얼마 뒤 이 깨달은 내용을중생들에게 전해주어야 좋을지 어떨지 몰라 망설였다. 눈 뜬 세상, 곧 깨달은 내용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은 도저히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비웃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색깔을 감지할 수 없는 장님에게 찬란한 태양의 눈부심을 이해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을 뜨지 않으면, 곧 직접 자기 자신이 깨닫지 않는 한 아무리 눈 뜬 세상에 대해 설명해 주어도 눈 뜬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깨달음을 얻은 뒤의 망설임을 악마인 파순과 착한 신인 제석천을 등장시켜 잘 묘사하고 있다. 파순은 석가모니에게 무지한 중생들은 그 어려운 법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할 수 없을테니 헛수고 할 필요없이 혼자만 간직하라고 유혹한 반면, 제석천은 그 법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중생들 가운데에는 이해하는 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니 전해야 한다고 권했다. 여기서 파순과 제석천은 석가모니의 마음속에 일어난 교화 문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서, 석가모니의 전기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 위해 극화시켜 놓은 것이다.
결국 석가모니는 제석천의 권유에 따라 깨달은 내용을 중생에게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것은 장님이라 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장님 가운데에도 수술을 하면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어느 정도 빛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사람,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수술과 치료를 하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을때, 좋은 의사라면 각자의 상태에 따라 적당한 수술과 치료를 해서 눈을 뜰 수 있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술도 해보지 않고 버려둔 채 일생을 영원히 장님으로 끝마치게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의사가 할 일이 아니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의사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석가모니인 것이다. 석가모니는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중생들에게 밝은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들의 능력에 맞게 가르쳐 각자의 능력껏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은 ‘일천체’라 하여 구제의 대상에서 일단 제외하지만,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능력에 따라 갖가지 방편으로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