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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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황선명
1995년 06월 160호
나무국토대자연南無園土大自然.필자의 기억 속에 아직도 또렷이 남아 있는 작가 고 정비석 씨가 쓴 어느 수필에 나오는 글귀이다.
ꡐ나무ꡑ라는 것은 ꡐ귀의한다ꡑ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의 나마스namas를 음역한 것이다. 따라서 대자연의 품속에 그대로 안겨 버리고 싶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유달리도 자별한 불교와 자연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문구와도 같아서 고등학교 때 읽은 그 수필의 이 대목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듯하다.
감히 불교의 그 엄청난 무량無量 설법의 진수를 얘기할 처지는 못되지만 여하간 불교는 종교 생태적 측면에서 자연과는 너무나도 긴밀하게 밀착해 있다고 느낀 적이 많다. 다른 무엇보다도 스님들의 수행 방식에서 자연에 절대적으로 귀의하는 면모를 여실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먼저 오늘날 스님들이 평상복으로 입는 가사는 본디 원시 불교 당시의 출가 수도자들이 입던 분소의糞掃衣에서 유래함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당시 출가자들은 무소유의 이상을 몸으로 체현하고 오직 용맹정진의 구도의 길에만 전념한다는 뜻에서, 생명을 간신히 이어갈 만큼의 식사와 몸의 아랫부분을 가릴 만큼의 천이면 족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을 덮은 얼룩진 천을 벗겨서 그것을 검정색 돌가루에 물들여 몸에 걸친 것에서 분소의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는 진정 불교 수도자의 자연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생태적 측면에서 볼 때 원시 불교 이래의 불교의 자연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다는 생각이다. 전 국토가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서 자연 생태계가 온전히 남아 있는 데라고는 송곳 꽂을 공간조차 발견하기가 어려운 이 시대에도 스님들은 해마다 결제나 하안거가 끝나면 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길을 떠난다. 물론 요즈음은 자동차 시대라서 스님들의 운수행각에도 승용차가 등장하는 것이 몰풍경이기는 하나, 정처없이 이 절 저 절을 유행 편력하는 가운데 집착과 아상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자연적 태도 이외에 또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불교의 자연적 태도는 노동이라고 하는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흔히 노동이라고 하면 뼈가 부러지도록 힘들게 일하는 것을 생각하므로 서양사람들은 그것을 산고産苦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바로 노동이 자연을 변형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종류의 동물이 많지만 인간만이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킨다. 아무리 포악하고 힘이 센 맹수라도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과거 기계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힘이 센 소나 말, 아니면 열대지방 같은 곳에서는 코끼리들을 동원해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관개 사업을 벌이지 않았는가 하고 밀이다. 그러나 그러한 축력畜力을 이용한 것은 사람이지 결코 동물이 주체적으로 그러한 일에 스스로 나서서 한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자연을 변형시키고 그 결과 역사의 발전을 이룩해 가는 것을 바로 문명이라고 하였다.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아주 심화시켰다. 그러므로 서양 사상에서는 자연적 상태를 ‘야만성’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고 역사의 발달이 인간으로 하여금 짐승이나 다름이 없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불교의 계율을 집대성한 사분율四分律을 보면 수행자가 땅을 몇 자판 파도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그런 엄격한 계율이 현실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불교나 동양 모든 종교는 자연을 외경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훼손하는 행위를 금기로 여겼던 게 확실하다. 물론 송대의 백장스님은 수행자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노동에 적극 종사하게 하는 청규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선원의 자급자족이라는 경제적인 목적이전에 수행자의 심전, 곧 마음의 밭을 간다는 데 의의가 있었던 것이지 결코 자연을 깔아뭉개고 정복하고 지배해서 거창한 문명을 일군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양 사상은 자연을 대자적對自的인 것으로 본다. 자연은 나의 밖에 있는 외부의 존재인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자연을 피지카Physik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바로 대상화된 어떤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자연을 말한다. 기독교에서도 하느님의 피조물인 이 세상의 온갖 만물을 인간이 마음대로 이용하고 또 향수享受하라고 가르쳤다. 신만이 외경의 대상이고 그 밖의 것은 설사 생명을 지녔더라도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므로 존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편리한 문명생활과 더불어 엄청난 물질적 혜택을 향수하게 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행복한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못하다. 특히 불과 한 세대만에 다른 나라가 한 세기를 넘는 오랜 세월 동안에 이룩한 변화를 몸소 체험하는 우리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강의 기적ꡑ 이라고도 말하는 우리나라의 경제적 발전과 물질적인 풍부함은 그 동안 국토 대자연을 모조리 깔아뭉개고 완전히 환골탈태의 지경으로 만들어서야 가능했다.
언젠가 조계산 일대를 개발해서 관광지로 만들려는 행정당국에 맞서 외국에서 온 송광사의 수좌들까지도 농성을 벌인 일이 생각난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물질적인 조건으로 멋대로 다루는 방식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인 것이다.
이제 와서 그것을 후회한들 소용이 없고 또 과거로 돌아가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전혀 도외시하고 살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이대로 파헤치고 때려부순 자리에 인공적인 가구물假構物만을 세우는 반자연적인 태도를 수수방관하고만 있을 수도 없다.
이러한 반자연적 태도에 대한 완벽한 해독제는 될 수 없어도 완화작용을 할 완충제는 모색해 보면 결국 불교의 이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불교에서는 자연을 결코 대자적인 물질적 조건으로 상대화하지 않으며 하나의 진여 眞如로 간주하고 있다.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如是一一如是 곧 자연은 그와 같이 의연한 모습, 다시 말해서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다.
만공스님은 수덕사의 큰바위에 백초시불百草是佛이라고 썼다. 저 별 볼일 없는 수만 가지의 하찮은 풀마저 부처님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산 위의 저 의젓한 소나무나 인왕산의 커다란 바위는 어째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그것을 가리켜 생명이 없는 초목이나 하찮은 바위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면 화엄경의 동체상즉司體相卽의 묘리를 터득하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불교의 가르침이 대자對自로서 자연에 대한 즉자卽自로서의 나라는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것, 말하자면 피아彼我의 구별이 동체상즉의 하나가 되는 진리를 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풀 한 포기, 길에 굴러 다니는 돌 하나가 다 내 몸이요, 내 살이고 자연과 한몸뚱이가 되는 것이 바로 동체상즉일 것이다. 달리 동체귀일同體歸一 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앞의 ꡐ나무 국토 대자연’ 은 그런 뜻에서 불교와 자연의 자별한 관계, 나아가 불교의 자연에 대한 외경 사상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