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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오는 길이 없이 가고자 발원하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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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성우/산청대원사 동국제일선원장 2004년 11월 273호
애초에 좋은 자리에서 시작했으니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수덕사 송만공 스님께서 계셨던 수덕사 견성암으로 가서, ‘저렇게 큰 공부를 하면 저리 크게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했으니 말이다. ‘제가 저를 똑바로 아는 도리’를 가르치신 스승을 무조건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복종했을 뿐 다른 감상이란 붙을 자리가 없었던 큰스님 회하에서의 한 해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법석이었다.
이곳 지리산 대원사에 들어온 지 오십여 년, 오늘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부처님과 저기 벽에 걸어놓은 사진 속의 만공 스님, 그리고 많은 선지식들과 함께 있는 듯하다. 여든 살이 되실 때까지 걸식해가며 무더운 폭염속을 걸어다니시면서 그 많은 이들에게 법을 전하고 구제하셨던 부처님을 상상하고, 갖은 고생속에서 공부를 이루셨던 큰스님들을 떠올리면 항상 그분들을 곁에 모시고 있는 듯한 것이다.
스물에 출가해 들어와서 여든둘이 된 오늘도, 나는 아침이면 금강경을 한 번 독송하고 모든 영가들을 한 번 축원해준 다음, 십악참회를 하고 앉아서 가만히 화두를 든다. 천주 염주를 열 번 돌리면서 화두를 들고 나면 아침나절이 끝나는 이 청복의 수행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인연이 얼마나 감사한가. 돌아보면, 한 순간인 듯 했던 길이었다.

‘절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내 얘기를 들은 어머니는 당신을 죽여놓고 가라고 했다. 일제시대, 충남 서산의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불법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랐던 내가 출가를 하고 싶어했던 것은 공부에 대한 열망이었다. 여자라 하여, 학교공부를 하려고 입학만 하면 집안에서 극심한 반대를 하고 싸움까지 일어나 물러서곤 했으나 공부해서 인생의 이치를 알고 싶었던 열망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으나 양반집안에 살림이 빈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들여보내지 않은 완고함이 나를 출가하게 했을 것이나, 돌아보면 그도 운명이지 않았겠는가.
야학에서 공부에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있었는데, 그 야학의 선생마저 해인사로 출가하고, 가깝게 지내던 야학선생의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부름을 받고 출가한 것이 내게는 집을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회였다. 나중엔 나의 사제가 되었던 그 여동생에게 나도 갈 수 있느냐고 편지를 띄웠더니, ‘오라’는 답장을 받고는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그토록 내게 정을 주었던 어머니에게마저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는 달려간 곳이 쌍계사 국사암이었다. 고향 주변의 수덕사로 갔다가 두 번이나 식구들에게 붙잡혀와 세 번째의 시도 끝에 성공한 것이다.
혹시나 또 집에서 붙잡으러 올까봐 국사암에 간 지 사흘 만에 머리를 깎고 한 달 만에 계를 받았다.
누구나 헐벗었던 일제시대인지라, 양식 하나 변변한 게 없었던 가난하고 조그만 절에서 우리 노스님하고 은사스님하고 사제 둘하고 일꾼, 이렇게 여섯이 살았다. 수덕사 견성암으로 갈 때까지 그곳에서 세 해를 살았는데, 얼마나 우리 노스님(문성 스님)에게 시집살이를 살았는지 모른다. 양식이 없어서 콩깻묵하고 감자를 우루루 삶아서 한 공기 먹고 하루종일 뙤약볕에 가서 밭을 맸다.
가을이 되면 산에 가서 도토리와 밤을 줍고, 봄이 되면 나물을 뜯어다 찬을 만들었다. 옷감도, 신발도, 아무 것도 없던 일제시대라 동지섣달에도 맨발에 짚신을 신고 산엘 다니면 한나절도 안 가서 신 끈이 끊어져 발에 피가 터져서 밤이면 잠을 못잘 정도였다. 소금밖에 사놓은 게 없었으니, 세숫비누는 물론 빨랫비누 하나 변변하게 없어 잿물을 내려 만든 비누로 세수하고 빨래하고 그렇게 살았다.
그래도 어떻게든지 공부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먼저 견성암에 가 있는 사제를 따라 그곳으로 가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일꾼으로 손색이 없던 나를 노스님이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다가 속가의 오라버니가 중병이 들었다는 연락을 받고는 너무 상심하는 나를 보고 노스님이 잠깐 다녀오라 하여 국사암을 나섰는데, 그때 사진이라도 찍어두었다가 지금 보았더라면 가히 볼 만할 것이다. 어른스님들이 입던 다 떨어진 두루마기에 뚜껑조차 없는 모자 하나 쓰고 떨어진 걸망 하나 메고 절을 나섰으니 말이다.
우리 노스님은 내가 돌아올 줄 아셨으나 사실 내가 떠난 것은 병든 오라버니 때문이 아니었다. 만공 스님이 계신 곳에 가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 들러 오라버니를 문병하고는 이틀 만에 바로 견성암으로 올라갔다.
이불 한 채 만들어 달랑 짊어지고 올라간 나를 보고 사제를 비롯해 모든 식구들이 반가워했다. 당시 일흔이 넘은 대도인이셨던 만공 스님은 천진난만하고 숙맥 같았던 스물둘의 나를 보고 굉장히 반가워하셨고 잘해주셨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얼굴에 웃음만 가득 피어났다. 채공과 별좌를 하면서 그렇게 신심나게 마음자리 찾는 공부를 하면서 살고 있는데, 만공 스님께서 갑자기 열반하셨다. 내가 그곳에 간 지 꼭 한 해만이었는데, 너무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초발심 때의 그곳에서의 한 해는 내 수행자의 삶에서 가장 기틀이 잡힌 시기였으니, ‘출가란 문자도 명예도 아니요 오직 제 마음 하나 깨치는 것이 근본인 참선하는 길’임을 알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가느냐’ 하는 출가사문의 명제를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가를 화두로 삼은 나날들이었던 것이다. 그 시기는 마음 하나 찾는 화두를 품은 채 뜨거웠고 간절했고 진지했다.
머리 깎은 지 한 달 만에 서둘러 계를 받았으나 사실은 만공 스님 밑에서 오롯이 마음공부에 매달렸던 그때까지가 나의 진정한 초발심 시기인 행자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대원사에는 서른넷에 처음 들어왔다. 대원사 밑 허름한 암자가 출가절인 이곳에 나의 은사스님인 법일 스님이 먼저 들어와 여순반란사건을 치르면서 폐허가 된 대원사를 일으키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잊혀지지도 않는 정월 초엿새날에 올라와 터가 어디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천막 하나 쳐놓고 개울에서 얼음물을 떠다가 일꾼들 밥을 해주고 천막에 밥 한 그릇 올리고 죽비 치고 예불하면서 탑전부터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불사가 지금까지 이어졌으니 대처승들과의 힘든 다툼 등 그동안 한 고생을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은사이신 법일 스님은 당시 여고까지 나와 은행에 근무했던 신여성으로 출가했음에도 얼마나 순진한지 한 번 고개 숙이고 걸어가면 정류장 다 가서야 고개를 드셨던 분이었다. 당신을 위해선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는 것에 돈을 쓰지 않았고 손수 옷을 지어입을 만큼 검소했다. 대원사 불사에만 마음을 오로지 하여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시주할 것을 권하셨으니, 감기가 들어 목에서 피가 넘어와도 나는 약을 사먹지 못했다. 보리쌀이 나올 때면 보리쌀 탁발하고 쌀 나올 때면 쌀을 탁발해서 불사에 보태고, 밤새도록 비를 맞아가며 기왓장을 실어나르면서 대원사 법당을 짓고 요사채들을 지은 세월이었다.
이제 언제 갈지 모르는 세월 앞에서 고통도, 좋은 것도, 바라는 것도 없으나, 단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가고 오는 길이 없이 가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