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는 이제 우기에 접어들어 8개월 만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지 않은 날들도 잔뜩 흐린 하늘 때문에 여름의 그 무더운 태양은 어디로 갔나 싶다. 겨울 동안에 일 년에 내릴 비가 몽땅 내린다고 한다. 오랜만에 보는 비 때문에 모두들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다. 여기에서는 이때쯤이면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많이 열린다. 특히 헐리웃 한국음악 축제에는 한국 유명 가수들의 초청 공연에 약 2만 명의 한인들이 찾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요즘에는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 매체의 발달로 동방신기, 세븐, 신화, 그리고 비 등 젊은 가수들의 노래와 그들의 프로필에도 상세하다. 어떠한 이유로든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좋은 것 같다.
또 다른 이벤트는 부호들의 대저택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꾸며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이곳 남 캘리포니아는 따뜻한 날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말년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온다. 이들은 커다란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살다가 죽은 후에는 지역사회에 기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가까이도 백 년 전에 지어진 대저택들로 이루어진 지역이 있다. 올해는 그 중 한 저택이 디자인 하우스로 선정되어 35명의 디자이너들이 나름대로의 개성을 발휘하여 집을 꾸며 일반에게 공개하는데 입장료가 무려 25달러나 된다. 이 디자인 하우스에서는 그 해의 인테리어 유행을 알 수 있고 입장료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집 꾸미기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 같다. 집이 넓은 이유도 있지만 그들은 빈 벽이나 공간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어느 집이던 가보면 작은 갤러리 같다. 기념사진은 말할 것 없고 여기저기 여행지에서 사온 공예품들로 집안이 가득하다.
이번에는 한 개인 사업가가 만들어 지역사회에 기부한 곳으로 유명한 헌팅턴 라이브러리(Huntington library)를 찾았다. 이곳은 LA에서 동남쪽으로 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 마리노 지역에 있다. 산 마리노 지역은 유서 깊은 동네로 박물관 못지 않은 규모의 큰 저택들이 즐비한 곳이다. 헌팅턴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곳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철도와 전기, 수도 사업가로 알려진 헌팅턴이 퇴임 후에 부인과 함께 희귀한 책과 미술품을 수집하여 1910년 문을 연 후에 그 후 1919년에 지역사회에 기부한 곳이다. 전체 면적 600에이커에 달하는 이곳은 도서관과 헌팅턴과 그 부인의 이름을 붙인 아트 갤러리, 수종별 정원과 지역별 정원이 있어 실제로 가보면 규모의 방대함에 놀랄 뿐이다.
먼저 도서관에는 영국과 미국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희귀한 책이 주로 수집되어 있으며 그 수는 6만권이 넘는다고 한다. 이곳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완전한 연구 도서관으로 유명하다. 다수의 초기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는 세계의 희귀한 성경책들을 특별 전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헌팅턴 갤러리에는 주로 18세기와 19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가구와 장식품이 많았다. 이곳은 각 방마다 특징적인 이름을 붙여 갤러리의 전시장이 아니라 어느 저택의 응접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전시방법이었다. 예를 들면 소파와 장식장 등을 배치하고 벽난로 위에 그림을 걸고 다른 벽에는 손으로 짠 직물을 걸고 장식장 안에는 다른 공예품 등을 전시하는 것이다. 시대별로 각 방마다 특징 있게 꾸미고 그에 어울리는 회화작품들을 전시하여 전시장을 나온 뒤에는 어느 귀족의 저택에 초대되어 갔다 온 기분마저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작 그림에 대한 인상보다는 주변의 장식품에 더욱 눈이 쏠려버리는 약간의 산만함이었다.
갤러리와 갤러리를 연결하는 산책로에는 아기자기한 조각품이 있고 중간중간에 장미 정원, 대나무 정원, 동백나무 정원 등이 보인다. 철 잃은 이곳에는 장미가 한창이고 심지어 동백꽃까지도 피어 있다. 지역별 정원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볼 만한 곳은 일본식 정원이었다. 이곳은 들어가는 입구에 굵은 대나무 밭을 만들고 군데군데 마애불들을 배치하고 있다. 구릉을 만들어 구릉 위에는 일본식 집을 짓고 그 밑에 연못을 만들어 연꽃과 창포 등을 심어 놓았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선 정원(Zen Garden)이라 이름한 곳에는 전형적인 일본 사찰의 정원을 옮겨 놓은 듯 모래 위에 수석 몇 점을 놓아 두었다. 아직 중국식 정원이 공사 중이라 그 규모와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여기서도 동양식 정원을 대표하는 것은 일본이라 씁쓸한 생각은 들었지만 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백인 꼬마 아이가 일본식 집을 보고 엄마에게 이 집을 원한다고 사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이나 웃었다. 어린아이 눈에도 그 정원에 어울리는 그 집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비가 올 것 같은 잔뜩 흐린 가을 날, 계절을 잃어 버린 동백꽃과 수련, 선인장 꽃을 보니 긴 여름, 더위에 지친 시간들을 잠시나마 위로 받는 듯 했지만 곧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