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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사 위빠사나 선원 지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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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4년 11월 273호
“좌선할 때는 아랫배를 이용해 숨을 마시면서 ‘부름’이라 하고, 내쉬면서 ‘꺼짐’이라 이름붙이며 아랫배의 움직임을 관찰합니다. 그러다 등이 가려우면 ‘가려움’하며 그 현상을 관찰하고 다시 가려움이 사라지면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산 아래 봉인사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일요일 새벽 5시까지 위빠사나 수련회가 있다. 지금은 실 수련에 앞서 한 시간 정도, 새로 온 초보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시간이다.
봉인사에서 위빠사나 수련이 시작된 것은 1999년도. 벌써 햇수로 6년째 접어들고 있다. 위빠사나 수련장까지 짓고, 주말수련회를 여는가 하면 우빤디따 사야도, 우자나카 사야도, 우예인다카 사야도 등 미얀마 스님들을 초청하여 수행법을 지도하는 등, 위빠사나를 불자들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 풍토에서 절에서 위빠사나 수련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한데, 봉인사는 앞으로도 위빠사나 수행처로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주말수련회를 이끌고 있는 이가 바로 지산 스님. 지난 5월 미얀마에서 귀국해 쉴 틈도 없이 위빠사나 수련지도에 나섰다. 봉인사를 위빠사나 수행처로 만들고자 하는 주지 적경 스님과는 같은 송광사 문중으로 족보를 따지자면 지산 스님이 삼촌뻘이 된단다.
위빠사나는 ‘나의 몸과 마음 나아가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스님은 설명한다. 따라서 수행공간이나 근기에 상관이 없고, 수행에 16단계가 있어 도인이 되지는 못해도 한 만큼 달라지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법이라고.
부처님은 이 수행법에 대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부처님 자신이 6년간의 사마타 수행을 끝내고 보리수 밑에 앉아서 위빠사나를 통해 정각에 이르셨다는 점을 지산스님은 소중하게 생각한다.

출가 후 10년간 제방의 선방만을 두루 돌았다. 출가하면서 스님은 10년 안에 반드시 해탈을 하겠다고 자신과 주위에 공언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방생활 10년에 이르고 보니 공안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고 화두가 풀렸다. 그러면 깨달음에 이른 것인가? 알고 보니 그것은 이치적인 깨달음이었다. 선가에서는 그런 것을 ‘해오解悟’라고 한다.
서울대 심리학과 출신으로 머리가 나쁘지 않았던 스님은 출가 전에 이미 여러 서적을 섭렵했고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과학시대의 불교> <세속과 초월> <나는 누구인가> <일본의 10대 선사> 등이 바로 스님이 번역 출판한 것들이다. 그중 <나는 누구인가>는 반응이 아주 좋았고, 아직까지도 제법 나가는 책에 속한단다.
운문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모든 부처님의 몸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에 운문 스님 왈 ‘동쪽 산이 물위로 간다.’ 유명한 화두다. 성철 스님 말씀 중에 ‘산이 물위로 간다’는 것은 이를 이른다.
“황당하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마음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산이 물위로 간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요. 그러나 알고 보면 화두에도 일정한 방식이 있는데 그것을 이해하면 의심이 없지요. 그렇다고 견성한 것은 아니고 이치적인 깨달음 바로 해오라고 합니다.”
간화선의 생명은 의심, 의심이 걸려 몰입돼 들어가야 하는데 의심이 안 걸리니 힘이 없다. 당·송 시대에 간화선이 성하다 송나라 중기로 넘어가면서 하락세가 되는데, 많은 서적들이 나오고 알음알이들이 많아지면서 화두에 대한 진정한 의심들이 약해졌기 때문이란다.
간화선에 회의가 생긴 스님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민하다 결국 이상적 모델을 찾았는데 중국과 한국의 유명한 선지식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이었다.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갔던 길을 가면 되는 일이다.
위빠사나는 부처님이 직접 실천한 수행법이라는 점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고 미얀마 스님의 위빠사나 수련대회에 참가해 보고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임을 알게 되었다.
227가지의 비구계가 철저히 지켜져 사미계를 받는 순간부터 돈을 만지거나 소유하지 않고 오후불식도 철저하다. 덕분에 위가 약한 지산 스님은 위에 이상이 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침 탁발을 나가면 길가에 늘어선 신도들은 스님들께 공양을 올린 후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그 모습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그들을 보면서 지산 스님은 우리 불교는 너무 부처님과 멀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법당에 부처님은 계시지만 수행자들의 마음속에는 부처님보다 조주·임제·마조와 같은 조사스님들이 더 가깝고, 신도들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더 가깝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지만 우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스님이 미얀마에 머문 3년 반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1년을 넘기지 못한다. 가장 큰 장벽이 언어문제. 언어가 중요한 것이 위빠사나는 인터뷰가 필수적이다. 수행과정 중에 이틀에 한 번꼴로 꼭 스승과 인터뷰를 한다. 그런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스님은 영어가 가능해 언어는 문제되지 않았다. 고승들은 대부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후도 쉽지 않다. 5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는가 하면 6개월간은 전혀 비가 오지 않고 무더위가 계속된다. 그리고 음식을 비롯한 문화적 차이 등등.
전공인 심리학도 수행에 도움이 됐다. 위빠사나는 그 자체가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해결 방법은 다를 수 있다.
“관찰을 하면 마음속에 증오나 집착 등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모든 정신과 물질세계는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니 삼법인三法印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좋은 마음 상태나 대상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냥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므로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지루한 것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의 모든 현상으로부터 초연하게 되지요.”
위빠사나에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10가지 근본 번뇌가 있다고 본다. 수행 과정 중에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한다. 인가라는 것이 없다. 그것은 부처님만이 할 수 있다.
지산 스님은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이렇게 비교한다.
간화선은 화두라는 것 하나를 정해서 거기에 계속 집중해 들어가는 것이다. ‘무’나 ‘이뭐꼬’ 하나에 자신의 모든 정신 에너지를 몰아가기에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데 비해, 위빠사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잘 이해하게 되고 일어나는 탐심, 진심, 치심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본질에 이르는 것이다.
간화선의 특징은 단순하고 강력한 데 있다. 그래서 상근기가 하면 힘이 있고 성취가 빠를 수 있으나 중근기나 하근기가 하면 별로 진전이 없다. 선방에서 오랫동안 화두 든 수좌나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이 큰 차이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간화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수행이 간화선으로만 치우치면 불교의 여러 측면이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책을 읽지 말라고 하니 교학이 약해지고, 자유자재해야 하니 계율이 무시되고, 지혜와 깨달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공덕행이 부족합니다.
위빠사나가 발전하면 조화로워집니다. 미얀마의 경우 출가하면 대부분 먼저 교학을 공부하는데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은 위빠사나 수행을 깊어지게 합니다. 또한 계율을 잘 지켜야 수행이 잘 되고 수행이 깊어질수록 계율이 저절로 잘 지켜진다고 합니다. 신도들은 이러한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을 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은 출가 전부터 갖고 온 존재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했었다. 나란 존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고 왜 통제가 안 되는가 등등.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문제에 매달리지 않는단다. 10년간의 선수행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자신의 문제가 정리됨으로써 거기에 더 이상 급급하지 않는다. 이제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진리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뜸 “그러면 당신이 깨달았다는 말이야?” 하고 시비를 걸어올 수도 있다. 그런데 스님은 상좌부 식으로 견성과 성불은 다름을 강조한다.
견성했다고 해서 부처님처럼 자재한 능력을 갖추어 중생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견성도 중요하지만 현상적인 여러 측면도 원만하게 구족해서 다양한 방편으로 많은 중생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부처님처럼 상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추어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수행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능력, 지산 스님은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좀더 폭넓은 수행과정을 터득하려고 한다.
지산 스님은 세계불교의 커다란 세 가지 흐름, 상좌부 불교와 선불교, 티베트불교의 통합을 꿈꾼다. 미래시대 불교를 세계화하려면 가장 정통성이 있는 상좌부 불교를 기본 틀로 하여 선불교와 티베트불교를 활용해 종합적인 수행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화선만이 옳다든가 위빠사나만이 열반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등 자신의 수행방법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의 근기에 맞게 각자에 맞는 수행방법을 제시해 많은 중생들이 보다 쉽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나아가서는 종교장벽까지 초월해야 한다. 그것이 스님이 후일 회향하고자 하는 방향이다.
한국불교도 점차 변화를 시도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시점이다. 위빠사나나 티베트불교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둘러보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빠르게 스며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한국불교도 마음을 열 때가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