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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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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이일섭 2004년 11월 273호
암자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심정적으로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담하고 조용한 이곳은 시든 가슴과 지친 삶을 충전하기에 적절한 공간이다.
풀벌레소리가 잠잘 시간을 말해주고, 새소리가 알람 역할을 한다. 산새소리에 눈을 뜨면 창호지가 서서히 밝아진다.
푸른 기운이 돌고 나면 옅은 노란색이 깔린다. 따뜻하게 밝아지는 빛과 잉크처럼 번지는 그림자가 창호지에 남는다.
종이를 통해 양쪽의 소리와 기온, 빛과 그림자로 안과 밖의 상황을 파악한다.
마법의 종이. 얇은 경계를 두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산길을 걷는다. 여타의 소리가 없는 밤엔 모든 소리가 크게 다가온다. 귀가 열리는 시간.
함께 길을 걷듯 물소리가 따른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어둠속에 별이 박혀 있다.
구름 없이 맑은 하늘. 하늘을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별들은 늘어만 가고, 바늘구멍으로 빛이 빠져 나오듯 별이 쏟아진다.
귀가 열린 만큼 눈도 밝아져 어둠에 적응한다. 숲은 잠이 들었지만 잠들지 못한 바람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나뭇가지를 흔들고……
달빛 없는 숲길을 걸었던 어느 때. 달이 밝아 길이 환하게 보이던 날이었다. 그런데도 신경이 곤두서서
소리와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길. 불빛이 빨리 나타나기만을 기대했고, 발밑이 불안해서 멀리 보지 못했다.
구름에 빛이 숨어버리면 오감이 레이더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오늘. 구름이 잔뜩 끼고 간간이 비도 내린다.
하지만 전보다는 가벼운 걸음이다. 앞에 보이는 어두운 코너가 불안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게 되지도 않는다.
전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데도 전혀 다른 상황이다. 어두운 주변을 살피던 전과 달리,
이번엔 길을 걷는 동안 주변 상황보다는 되도록 마음속을 살피며 걸으려고 했다.
밝은 대낮에 길을 걸으면 바람과 햇빛, 소리와 촉감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는데…… 칠흑 같은 어둠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레이더망을 교란시키는 원인이 된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고 했던가?
‘이 작은 일에도 그 말은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편한 길이란 밝고 향기가 나며, 적당한 바람이 있는 길이 아니다. 익숙한 길도 아니다.
잘 닦인 길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편하면 좋은 길이 될 수 있다. 모든 길이 불안할 수도 또는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