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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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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하재봉 / 영화평론가 2004년 11월 273호
영화는 거짓말이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영화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의 공간에서, 실재가 아닌 허구적 이야기 구조를 통해 삶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도대체 영화는 무엇인가? 영사기가 멈추면 스크린의 빛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손에 잡힐 것처럼 두 눈 앞에 분명히 존재하던, 실재처럼 보이던 것들은 환영이 되어 우리들의 헛된 기억 속에서 떠돈다. 그것들은 없으면서 있고, 분명히 있으면서 없다. 실재가 아닌 실재, 그러나 허구가 아닌 허구가 영화다.
영화의 본질은 선문답과 많이 닮아 있다. 육조대사의 거울에 관한 화두는, 곧 영화에 관한 화두로 옮겨 놓아도 통한다. 영화는 현대적 의미의 거울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잠깐 현실에서 일탈하여 현실의 근심과 걱정을 잊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며 허구적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영화는, 그 허구적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비실재의 서사구조를 통해, 현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하나의 거울이다. 그것은 나의 실존적 위치와, 또 내 삶이 속해 있는 동시대적 의문과 집단적 고뇌를, 스크린이라는 전자적 거울을 통해 다수의 대중들에게 비춰 보여준다. 그러므로 좋은 영화는 현실을 잊어버리는 마취 상태에서 잠깐 동안의 일탈된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력하게 현실의 삶 속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국 영화는 그 중심 테마가 실존적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항상 건강함을 유지해 왔다. 그러므로 한국 영화의 대명사인 임권택 감독이 김성동의 원작소설을 영화화 한 “만다라”를 통해서 비로소 작가주의 감독 대열로 접어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백만부가 팔린 80년대 초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만다라”는,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속세를 떠난 두 스님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안성기 전무송의 인상적인 연기와 한국의 수려한 풍광이 아름답게 만나면서, 형이상학적 주제가 대중적 재미를 갖춘 임권택 감독의 이 영화는 한국 불교 영화의 한 정점에 있다. 그 후 임권택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통해 다시 한 번 불교적 세계의 장엄한 접근을 시도한 바 있다. 칸느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취화선”도 불교의 연기법과 해탈이라는 핵심 테마를 제외하면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김기덕 감독은 현재 한국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국제적 지명도가 높은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섬”과 “수취인 불명” “빈 집”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나쁜 남자”와 “사마리아”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진출한 바 있다. 세게 3대 영화제에서 칸느 영화제에만 아직 입성을 못했을 뿐, 베니스와 베를린에서는 각각 “빈 집”과 “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작품성이 높은 영화로는 르카르노 영화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는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두어들인 작품이다. 현재 “태극기 휘날리며”가 상영 중이지만 아직 “봄 여름…”의 기록을 넘지는 못하고 있다.
대부분 미국 내에서 개봉되는 한국 영화들이 재미교포 관객을 의식해서 코리아 타운을 중심으로 상영되는 데 비해서 “봄 여름…”의 경우 일반 미국 관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미국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 언론의 높은 관심을 많이 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 미국 지성인 층에서 불고 있는 선불교에 관한 관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 성우 더빙 없이 자막 처리되며 개봉되는 외국 영화들의 주 관객은 지식인 계층이다. “봄 여름…”은 미국 영화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동양정신의 극점을 묘사하고 있고, 바로 그 부분이 미국 지식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김기덕의 9번째 영화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의 김기덕표 영화와는 외형적으로 확연히 다르다. 그의 영화에 언제나 빠짐없이 등장했던 엽기적 표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칼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거나(“수취인 불명”), 목구멍이나 질 속에 낚시바늘을 넣고 자해하지도 않는다.(“섬”) 기껏해야 어린 동자승이 물고기나 개구리의 몸에 작은 돌을 매달고 즐거워하는 것뿐이다.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 봄의 5개 장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인생의 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다시 유년기와 대위법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하찮은 동물을 통해 살생의 업을 시작하고/사랑과 욕망의 집착을 배우게 되며/아내를 살해함으로써 분노를 극대화하고/내면의 평화를 구하면서 모든 것을 비워가는 과정이 계절의 순환과 함께 표현된다.
물 위에 세워진 절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시작하고 갈등하며 화해한다. 직선적 구성이 아닌, 순환적 구성이다. 이승에서 지은 업이 다음 생으로 윤회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욕망의 부질없음에 대해 말하는 주제의 깊이는 서정적 화면과 어울리면서 오랫동안 우리의 영혼을 뒤흔든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유년시절부터 외딴 절에서 자란 스님이 주인공이다. 소외된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은, 자극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결국은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가 된다.
산 속 호수 위에 세워진 절의 배경은, “섬”과 흡사하다. 물 속에 세워진 절 안에는 또 작은 물이 2개나 있다. 절밖 마당의 거북이가 토해내는 작은 연못, 절 안, 불상이 자리잡은 돌 속의 작은 연못이 그것이다. 물 속의 물은, 바깥세계에서 부처님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삶을 더욱 정화시키는 이미지 역할을 한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주는 물의 이미지와 대립하는 것이 불의 이미지이다. 불은 욕망을 상징한다. 봄에서 아이는 뱀의 몸에 돌을 매담으로써 뱀이 피를 흘리며 죽게 한다. 살생의 업을 시작하는 것인데, 피는 불의 이미지가 물과 만난 것이다. 또 여름에서는 내면의 활활 타는 욕망으로 소년은 소녀와 정사를 한다. 가을에서는 빨갛게 든 단풍이 아내를 살해한 청년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스님은 물 위에 장작불을 태우고 그 위에 자신의 몸을 세움으로써, 불로 이승의 욕망을 정화하고 물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외에도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차지한 “오세암”은 정채봉의 동화를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안시 애니메이션은, 전세계 애니메이션 영화 페스티벌 중에서 최고의 영화제다. “오세암”은 박철수 감독에 의해 실사 영화로도 만들어진 적이 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오세암”은 겨울 산사를 배경으로 외로운 오누이의 삶이 훨씬 더 여백 있게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 못지않은 “오세암”의 쾌거가 “올드보이”에 비해 지나치게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애니메이션계의 칸느 영화제로 불린다. 우리나라 영화로서는 이생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가 대상을 차지한 적이 있지만, 그때에 비해서도 “오세암”의 수상은 국내 언론이나 관객들로부터 지나치게 홀대받아서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또 예전의 영화 중에서는 역시 르카르노 영화제 대상을 받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들 수 있다. 고행하는 수도승의 자세로 만들어진 배용균 감독의 독립영화는, 대부분 산사에서 촬영되었는데 노스님과 청년 스님, 그리고 동자승의 세 스님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묻고 있다. 마치 하나의 쇼트가 한 편의 회화처럼 정성스럽게 찍혀져 있다. 불교적 정신세계와 영혼의 갈증에 직면해 있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연결시킨다.
지금은 가장 막강한 대중적 호소력을 갖고 있는 영화 장르에 대해, 범불교계의 현명한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좋은 불교 영화 한 편은 그 어떤 포교보다도 뛰어난 힘을 발휘한다. 대중적 조폭 코드를 불교와 접목시키며 흥행에 대성공 한 “달마야 놀자”의 속편, “달마야 서울 가자”도 제작되었지만 전편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것은 불교 정신이 핵심 주제와 아슬아슬하게 만났던 전편과는 다르게, “달마야 서울 가자”에서는 불교가 장식적 차원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불교 영화에서 바라는 것은, 좀더 쉽고 접근하기 쉬운 영화라는 대중적 통로를 통해서 삶의 본질과 마주하자는 것이다. 좋은 한국 영화들은 한국인의 심층적 집단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이런 욕망을 회피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불교 영화가 변화하는 세속적 삶과 어떤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과제를 우리는 풀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