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마음의 흐름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전재근 2004년 11월 273호
오늘도 나는 흘러갑니다. 사람들 속에 휩쓸려, 일에 흽싸여 흘러갑니다. 벗어나려고 해도 도도한 흐름은 거슬러 가기가 힘듭니다. 나이를 거슬러 흐를 수 없는 것 같이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이 자그마한 육체가 둥실둥실 떠 흘러간다고 봅니다. 육체가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 몸을 만들어 갖고는 끌고 간다고 보는 것이지요.
과학자들은 사물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려는 버릇이 있어서 그냥 넘기질 않습니다. 사람이 육신과 정신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분석해 보려고 하지 않겠어요! 몸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칼슘, 인산 등의 성분으로 되어 있다고 밝혀내고 이들의 모양과 무게를 알아냅니다. 궁극적으로는 원자핵과 전자와 같은 소립자(작은 알갱이)로 구성된 물질의 집합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 작용을 하는지도 알아냈습니다. 이런 과학기술들이 발달하면 인간은 그 혜택과 피해를 같이 안고 살게 됩니다.
전자기술의 예만 들어도 그렇습니다. 전기는 소립자 중의 하나인 전자의 흐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라디오, 전화, TV, 핸드폰, 컴퓨터, 인터넷 등 이 모두가 전자의 흐름과 자기들 또는 그들 주변과의 반응을 이용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전자가 흐르게 하려면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전자를 주는 쪽과 전자를 받는 쪽이 필요하지요. 강물의 흐름에 유속이 있듯이 전자의 흐름에도 속도가 있습니다. 전자의 속도는 광속도와 같습니다.
주고받는 거래가 많아지면 연락망이 생겨 통신망이 되고 그 통신망이 세계 구석을 연결하여 world wide web이라는 인터넷 전산망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쉽게 주고받고 살며 혜택도 크지만 그 피해도 입고 삽니다.

마음의 잣대
물질세계에서는 어떤 물질의 성질을 밝혀내려면 반드시 측정하는 잣대가 있어야 합니다. 잣대의 재료로는 대나무를 많이 쓰는데 여름이면 늘어나고 겨울이면 줄어드는 정도가 아주 적어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잣대는 전자와 같은 미세한 것을 재기는 너무 크고, 더더욱 움직이는 것을 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빛의 속도를 자로 쓰기로 했습니다. 빛은 2.9997x108m/s(초당 3억m) 이니 1m를 빛의 속도의 3억분의 1이라고 할 수 있고 빛의 속도는 기온이 변해도 세월이 가도 바뀌지가 않아 잣대로 쓰기로 했고 또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탐구하는 기본 잣대는 마련되어 있는데 마음을 측정하는 잣대가 마땅치가 않나 봅니다.
나를 늘 끌고 다니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보려고 하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제 것을 제가 모른다면 말이 안 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쩝니까! 마음을 차근히 잘 관찰해 보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선 모양과 크기를 알 수가 없어요.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 속도가 얼마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물론 마음을 본 분이 있어 그분을 부처님이라 하지요. 부처님이 보신 마음은 청정한 마음이며 생명의 근본자리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마음을 중생들에게 보여줬는데 아무도 모르고 가섭 존자만이 그 것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가섭이 알았는데도 같이 있었던 다른 대중들은 몰랐을까요? 이것을 일러 불교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생에게로 흘러가야 하는데 눈에 안 보이니 물건을 주고받듯이 전해 주는 길이 쉽지가 않습니다.
부처님도 사리자에게 반야심경을 설할 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불생불멸불구부정不生不滅不垢不淨 …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 무의식계 …’ 라고 무無자를 많이 썼습니다. 이 경은 우리의 본심本心자리를 두고 한 말인데 이런 마음을 어떻게 모양이며 크기를 잰다고 덤벼들 수가 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의상 대사가 법성게에서 그 마음을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切一切(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가 끊어진 것) 라고 했겠어요.
그래도 과학자의 소견엔 뭣인가를 기대어 파고들려는 시도를 합니다. 불교신자들도 누구나 견성을 바라고 있으니 그렇겠지요. 그런데 진작 마음을 바로 알려면 마음의 크기, 모양을 알아야 하겠고 그럴라치면, 마음을 잴 수 있는 어떤 잣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잣대를 가진 사람은 마음의 흐름을 잴 수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세친 보살(바슈반두, AD 400)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50여 가지로 분류해 놓았고 이 마음의 근본을 아뢰야식으로 보았습니다. 이 본심이 한번 꿈틀대어 만 가지 생각을 일으켜 끝없는 생각(번뇌)을 만든다고 했어요. 이 것이 소위 유식론이라고 봅니다.
태양이 태양계 속에서 만물의 근원이 되고 그 빛의 속도를 물질세계를 가늠하는 잣대로 쓰고 있다고 한다면 분명 아뢰야식은 마음의 세계에서 근본이 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一念)의 속도를 마음의 세계를 가늠하는 잣대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일단 잣대가 마련되면 온갖 생각들의 모양, 크기, 속도 등을 잴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만하다 이겁니다. 과연 모양 없는 마음의 속도를 잴 수가 있을까요? 화가인 김홍도를 알려고 하면 그가 남긴 작품을 보면 그의 삶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속도
고요한 산사에 머물며 밤하늘을 쳐다보면 내 눈길은 한 순간에 저 아득한 별자리를 더듬으며 마음은 무수한 별들 사이를 돌아다닙니다. 빛의 속도로도 100년 만에 도달하는 거리를 이 마음은 순식간에 왕래하니 마음의 속도는 가히 무한대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범부의 마음도 이러할진대 아뢰야식 근본 마음에서 살고 있는 고승들의 마음의 속도는 짐작인들 하겠습니까!
속도가 빠르면 거리감이 없어지고 시간의 개념이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달될 때 음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말을 주고받을 때를 보면 입이 움직이고 나서 한참 후에야 소리가 들립니다. 그 이유는 음속이 1초당 340m의 속도로 빛의 속도보다 엄청나게 느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미국서 걸려오는 전화가 마치 이웃집에서 오는 것과 같이 시간과 거리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음속의 백만배나 되는 빠른 전자파의 속도에 말을 실어 가기 때문에 거리와 시간의 차이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요즘 법당의 탱화를 유심히 보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모이신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보살들이 사는 세계는 수 - 수억 광년씩 떨어져 있는데도 모두가 평면으로 입체감 없이 그려 놓았습니다. 입체감을 무시한 것은 화공이 입체적 표현기술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시간과 거리가 무시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이 탱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봅니다.

마음의 운동
물질이 운동할 때는 운동의 방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뉴턴(newton)은 운동방정식을 만들어 놓았고 대부분의 운동은 이 방정식으로 설명됩니다. 서울의 63빌딩 위에서 동전을 떨어뜨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방향은 땅을 향하며 속도도 계산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전을 떨어뜨리는 사람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어떠할까요?
아마 돈다발을 떨어뜨린다면 사람들은 그것의 낙하점을 쫓아 저마다 달려들 것입니다. 마음이 돈을 향해 달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물체가 낙하하는데 누군가가 “폭탄”이라고 소리치면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것입니다. 마음이 죽기 싫어서 달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마음의 방향은 나에게 좋고 나쁜가에 따라서 운동방향이 정반대가 될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방향뿐만 아닙니다. 흘러가는 방식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물질세계의 빛은 일직선으로 진행하다 물건이 나타나면 막히는데 마음은 막히면 돌아가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아끼는 곳에선 오래 머물고 애착이 커지면 떠나지 못하고 뱅뱅 돕니다.
전자가 주고받는 대상이 있듯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개의 문을 통해 마음은 끊임없이 경계와 마주치며 모양, 소리, 냄새, 맛, 생각을 주고받으며 드나듭니다. 받아들인 것들을 편집하여 쌓아놓고는 내 것이라 하고 이것을 밑천으로 잘 살기도 하고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눈으로 보는 세상은 불빛에 비치는 상相을 보지만 마음이 보는 경계는 빛에만 의지하지 않고 빛이 없어도 봅니다. 그 상이 보살상이다 하면 모이고 귀신상이다 하면 도망갑니다.

마음의 지도
세친 보살은 마음 속의 경계를 6식, 7식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들 식들 사이를 흐르는 마음의 가지치기를 번뇌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식의 흐름으로 보고 들고나며 생명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았으니 감탄할 만합니다. 오늘의 생물학은 생명의 흐름을 유전학이란 이름으로 설명합니다. 멘델이란 신부가 완두콩의 유전 현상을 밝혀냄으로써 근대 생물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인 세친 스님이 생명체 중의 생명인 마음의 흐름과 작용을 밝혀낸 것은 실로 놀라운 업적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불교계 내에서만 알려지고 있을 뿐이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세친 보살의 마음의 지도야말로 한 생각이 동하여 팔만사천 가지 생각을 쏟아내고 살지만 그 근본 마음에는 한 생각도 없는 청정함 그대로이며 어떤 잔가지의 중생심도 종국에는 한 생각도 없는 본심에 통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단풍철이 돌아왔습니다. 아마 가야산에는 단풍을 즐기는 행락객도 많겠지만 해인사 불자들의 마음의 나들이는 단풍보다 훨씬 아름답고 깨끗한 풍광이 펼쳐지고 있으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