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와 올해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것 가운데 하나로 웰빙 붐을 꼽을 수 있다. 거리의 점포마다 웰빙으로 포장한 상품들로 주머니를 열라고 한다. 웰빙 붐을 사회학적으로 본다면,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이미 잠재된 현상이었다. 국민소득 1만불이 넘어서면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국민소득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에서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먹고 입고 머무르는 것이 해소될 때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을 먹고 입고, 어떤 공간에서 살 것인가의 문제로 옮아간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지향의 모델을 서구 특히 미국식을 따르는 것에서 찾았다. 몇 가지 코드를 찾아본다면, 청바지와 햄버거가 그것이었으며, 육식의 일반화, 미국의 팝송이 그렇고, 각종 제도의 수입에서 미국에 경도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나타난 웰빙은 건강식을 대표하는 채식과 건강을 고려한 인체공학적 자동화 시스템을 채용한 주거공간 등 자연 또는 환경친화적 경향을 띠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웰빙은 주류세대의 변화를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세대에서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를 요청한 세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20, 30대 그리고 40대 초반의 연령대이다. 이는 권위주의 세대와 신세대의 가치관의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세대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웰빙 붐을 보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급격한 경쟁사회에 대한 반성 혹은 불안감의 팽배가 웰빙 붐을 결과했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재의 안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앞서 얘기한 자기중심주의와 맞물리면서 현재에 천착하는 경향은 더욱 고착되고 있다. 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은 가상의 현실이 아니라, 피해갈 수 없는 아득한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웰빙 붐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배어 있다.
지금의 웰빙은 그것을 누리는 개인에게는 사회의 발전임에 분명하지만, 누구나 그런 웰빙을 추구할 수는 없다. 소득수준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나 가능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80:20의 사회가 되었다. 소득수준 상위 20%와 하위 80%의 구성비율을 보이고 있는데, 웰빙을 추구하는 만큼 사회보장제도가 빈약한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은 소득격차에 의해 더 큰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적 웰빙이 되지 않고서는 지금의 웰빙은 진정한 웰빙이 아니라는 비판적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이 지적에 귀를 기울인다면 최고의 웰빙은 무엇일까. 세계관에 따라 다르게 답할 것이다. 그러면 불교인의 웰빙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부처님을 닮는 것, 나아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에 있다. 불교에서의 수행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즉 삼독심(貪瞋癡)을 여의어 마침내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삼독심을 여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물질로부터의 자유이며, 사람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이며, 연기법의 체득이다.
많은 사람들은 웰빙을 위해 사찰을 찾는데, 정작 우리 불교는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스님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요즘 스님들 소득수준은 2만불은 되지,” 이런 말이 나온다. 사찰에서 여는 수련회는 이미 참가희망자가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할 정도이며, 휴일이면 산사를 찾는다. 그곳에서 숨가빴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간다. 산사는 많은 사람들이 들르는 웰빙 코스가 된 것이다. 그런데 혹시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최고의 웰빙 공간이 될지언정 생활은 진정한 웰빙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를 들게 한다.
수행자는 최고의 지위이다. 우리가 부처님을 인천人天의 스승이라 경칭하듯, 부처를 이루기 위해 이생에 태어났다고 여기지 않는 수행자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위를 갖기에 충분하다. 수행자는 삼독심을 여의기 때문에 최고의 지위에 이른다.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을 갖는다면, 권력자에게 떳떳할 수 없다.
일찍이 물질의 추구를 꺼려 산문에 들었기 때문에 신도들은 스님들께 공양을 올린다. 물질로 인해 사람들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그로 인해 좌절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산사를 찾아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물질로부터 초연하면서 동시에 조화와 나눔의 가르침을 펼쳐보이는 불교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큰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사항은 그 변화의 방향과 흐름의 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혹자는 이념논쟁이라고 부른다. 어떤 신문은 이념전쟁이라는 섬뜩한 용어를 갖다붙이는데, 사상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논의이다. 사람의 생각을 네모 칸으로 가두려 할 때 세모나 동그라미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차단된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사회발전을 이룰 수 없다.
또 하나는 과거사 규명에 대한 것인데, 이는 정치적 이해득실 문제로 변질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야당에서는 박근혜 대표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장교복무 경력이 차기 대선에 미칠 악영향을 계산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극구 반대하는 모양이다. 여당도 경쟁정당의 대표를 낙마시킬 수 있는 효과를 은근히 기대하는 것일 테고. 과거사의 규명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사회적 반성이다. 되돌아봄 없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인가. 되돌아봄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고,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씻김굿이 있을 때 미래로 나아가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과거사 규명은 미래를 향한 한 판의 제의적 성격을 갖는다. 이제야 우리는 그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웰빙은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나타나는 고급한 소비 취향만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을 규정하고 또 개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건전성이 획득될 때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으로는 과거의 권위주의를 넘어서서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보장하는 큰 흐름을 만들어나갈 때 웰빙은 성립된다. 여기에 불교의 가르침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며, 탐진치 삼독심을 제거하는 가르침이 사회적으로 회향될 때 개인과 사회의 웰빙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스스로 우리들 살림살이를 성찰적으로 바라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현하기 위한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점검하는 일이 요구된다. 그런데 성찰하고 점검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10년 전 우리 불교는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개혁을 성취한 집단적 역사경험을 이루었다. 10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다시 개혁이 얘기되고 있다. 다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