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 대둔사(대흥사), 上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가람의 글씨를 찾아서 - 조수현
1995년 05월 159호
해남은 내 마음을 유난히 설레이게 할 만큼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유명한 사찰도 있거니와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로서 보길도라든지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 조선 후기로부터 내려오는 허소치, 미산, 남농 등 삼대에 걸쳐 남화의 맥을 이어 그 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라든지 역사와 문화의 향긋한 정취가 담겨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부터 가려고 마음먹었으나 여의하지가 못하여 몇 차례나 미루어 왔다. 그러다가 4월에 들어서야 겨우 마침 무주 구천동 덕유산에서 학과에서 마련한 종합 엠티에 참석하고 시간을 내어 달려갔다.
아침 일찍 무주를 출발하여 다섯 시간 넘게 차를 달려 대흥사에 도착하니 정오였다. 총무 보선스님의 따뜻한 배려와 안내로 상세하게 설명을 듣고 사찰과 인근 암자까지 두루 둘러볼 수 있었다. 도착하기 하루전에 차 일로 중국으로 떠나신 일지암의 여연스님을 뵙지 못하고 목포로 발길을 옮긴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보선스님의 말씀으로는, 대흥사가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임진왜란 때에 큰 활약을 한 서산대사의 유품들을 보관하게 된 뒤로 한때는 크게 강성하였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 여러모로 피폐해졌다고 한다.
사찰 이름도 본디는 ꡒ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였는데 뒤에 대흥사로 고친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여 요즈음 다시 본디의 이름으로 복원하려고 하는데 그 절차에 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위의 현판 ꡐ두륜산 대흥사 는 여초 김응현의 작품으로 제작 시기가 1960, 1970년대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밑의 현판 ‘두륜산 대둔사’ 는, 근년에 대둔사의 복원 작업을 서두르려는 뜻에서, 사찰 입구에 새로 문루를 크게 세우고서 전주의 서예 대가인 강암剛蓭송성용宋成鏞옹에게 휘호를 부탁하여 현판을 걸어 놓은 것이다.
“해탈문”의 현액은 어느 시대, 누구의 필적인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 필치가 활달하고 호방하여ꡐ해탈ꡑ의 글자 뜻마냥 그야말로 막히고 걸림이 없어 보이는것이 그냥 무심히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
그 해탈문의 바깥쪽에 양쪽으로 걸려 있는, ꡒ나무아미타불ꡓ, ꡒ나무관세음보살ꡓ이라고 쓴 주련 글씨는 사뭇 고박하고 진중한 느낌을 준다. 부처를 염원하는 진지함이 스며들어 있는 이 주련의 소박함에 이내 마음으로 정이 감을 느낄 수 있다.
대홍사의 남다른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사찰은 조선 후기 이후의 우리나라 역대 서예 대가의 필묵 현판이 마치 서로 명작을 겨루기라도 하듯 또는 시새움을 하듯이 즐비한 것이 퍽 이채롭다. 아래에 소개된 네 개의 현판들을 보자면, 위에서부터 차례로 ‘대웅보전’,
‘천불전’ 및 ‘침계류’는 원교 이광사(1705~1777)의 필적으로서,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갈 때와 유배가 풀려서 돌아올 때 등에 얽힌 일화들을 지니고 있는 현판이다. 그리고 맨 밑의 “가허루” 는 조선 후기 호남의 명가 창암 이삼만(1770~1847)의 필적이다.
위에 소개된 ‘일로향실’을 위시하여 ‘동국선원’과 ꡐ무량수각’의 글씨들은 특히 이 곳 대흥사와 인연이 깊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유필이다.
맨 위에 있는 ꡐ일로향실ꡑ은 이 곳 대흥사의 일지암 암자에서 ‘동다선’, ‘다신전’ 같은 책을 저술하고 또한 평생토록 차에 대해 연구한 초의 선사와 인연이 깊은 현액일 것으로 추측된다. 위에 있는 “표충사” 현액은 조선시대에 서산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정조 임금이 재위 12년(l788)에 사당을 짓고 하사한 어필이다
위에 있는 ꡒ대광명전ꡓ은 일지암 암자로 올라가는 길목에다 그 옛날에 초의선사께서 세운 강원이 있는데, 그 건물에 걸려 있는 현액이다. 이것은 신관호의 휘호작으로서,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해서 작품이다.
위에 소개된 ꡒ보련각”의 현액은 그 서풍으로 보아 신관호의 작품임에 거의 틀림없으며. 그 밑의 ꡒ용화당”은 일제시대에 크게 활약한 명필인 성당 김돈희의 휘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