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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약수암 이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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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4년 10월 272호
이암 스님을 통영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갖지 못했다. 태풍의 영향으로 서울에서 출발예정이던 날 일기가 너무 안 좋았다. 마침 며칠 후, 종회가 열린다 하여 조계사 앞에서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암 스님은 종회의원이다. 종회가 의외로 일찍 끝나는 바람에 몇 시간을 기다리신 모양이다.
덕분에 오가는 시간은 줄었지만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의 아름다운 바닷가 전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약수암은 법당과 요사채 두 동만 있는 작은 암자지만 바다가 보이고 통영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가 근사한 곳이라는 스님의 자랑을 들으니 더욱 아쉽기만 하다.
이 절은 스님이 10여 년 전 구입한 땅에 딸려 있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땅값 천오백만원에 개조 및 내부시설비 천만원 해서 총 2천 5백만원이 들었단다. 산악지대에는 이렇게 천 몇백만원만 주면 땅에 집까지 거저 딸려오는 곳이 널려 있으니 굳이 서울 고집할 것 없이 통영으로 오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현재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이 세상을 다 줘도 행복해질 수 없지요.”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스님은 정기적으로 황실 부럽지 않은 약수암을 떠나 있다 돌아오곤 한다. 안거에 들어가는 기간이다. 지난 4년 동안 이암 스님은 동안거와 하안거를 한차례도 거르지 않았다. 두 해는 봉암사에서 두 해는 해인사에서.
안거를 거르지 않자 주변에서 놀라움을 표했다. 스님이 선방에서 안거를 나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암 스님은 출가후 30년 동안 한번도 선방행을 택하지 않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뒤늦게 선방에 간다기에 한 철이나 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여덟 차례나 이어지니 놀랄 수밖에.
애초에는 은사이신 고산 스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암 스님은 기꺼이 이에 따랐다. 출가자라면 누구나 선방에 대한 동경이 있기 마련이고 스님 역시 그러했지만, 사실 그동안 용기가 없었다고 한다. 시민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종단이나 본사 소임을 맡는 등 30년 이상 사판의 길을 걸어온 터에 이제 와서 방향을 전환하기는 쉽지 않았다.
“은사 스님 말씀이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선방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스님은 은사 스님께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선방행이 아니었다면 불교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선방 가기 전에도 구경의 가치나 깨달음에 대해서 늘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책 속에 해답이 있을까 하고 이것 저것을 뒤져보지만 대다수 책들은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괜찮은 책이다 싶어도 내가 경험한 부분과 차이가 있어 딴 세계의 일이었다. 조사 스님들이 실사참구를 중시여긴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고 한다.
부처님 이전에는 그 누구도 초월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한 바 없고, 유아有我를 이야기했지 무아無我를 말한 이는 없었다. 인간은 본래 무아이기에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며 또한 절대자와 둘이 아닌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애초의 모습을 찾아가는 지름길이 참선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넓고 깊으며 아름답고 평화롭고 따뜻한 바로 그 모습으로.
그러면 이전에는 그런 것을 몰랐느냐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노스님들의 법문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았다.
오래 전에 한 사형의 법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삼법인 사성제’등 이런 교리를 논리적으로 알려고만 하지 말고 뼈에 사무쳐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저 좋은 말이다 싶었는데, 선방에 가서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논리가 아닌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뼈에 사무치게 체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이암 스님은 말한다.
“언어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기에 참선을 통해서만 마음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어요. 그때 비로소 변화가 오는 것이지요.”

선방의 안거수는 얼마 안 되지만 법랍 30년이 넘기에 선방에서 스님 자리는 앞좌석이다. 선방은 철저히 법랍 위주다.
선방 경험이 전혀 없던 첫철 한 달간은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였다. 하루 12시간씩을 앉아 있어야 하는데, 좌골이 열린다고 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파서 공부는커녕 뭘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를 해제하면 제일 먼저 해부학 책 보고 뼈가 어떤 구조인데 이렇게 아픈가부터 분석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두 달 석 달 지나니 고통은 없어지고 지금은 졸기를 잘한다. 처음에는 한 시간이 여삼추 같더니, 이제는 12시간이 눈깜짝할 사이에 가버린다.
처음에는 조는 사람을 보면 공부도 안하고 졸기나 하나 싶어 밉더니, 이제는 스님 자신이 졸고 있다. 그러면 이래서는 안 되지 하고 화두를 들려고 애를 쓰는데, 구참 스님들 하는 말씀이 ‘조는 것도 한 생각 쉬지 않으면 안 돼’하시더니 이제는 그도 이해가 간단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롭지 못하면 졸지도 못합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긍극의 목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이 있다면 분주한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5~6시간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시간을 도둑질하는 훈련을 톡톡히 쌓은 덕이다.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의 차이는 어느 정도 쉬어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지요. 분주함이 쉬고 그 자리에 사물에 대한 인생에 대한 깨달음, 지혜가 차지하면 밖으로 평화로움이 나타나지요.”

해제하면 이암 스님은 꼬박꼬박 은사스님께 인사드린다. 그러면 고산 스님은 꼭 한마디씩 던져주시며 제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한번은 은사 스님께 질문을 드렸다.
봉암사에 있을 때 진공문과 묘유문이 따로이 두 개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 것에 대한 것이었다. 현상계가 공으로 보이지 않으면 묘유로 보일 수가 없다. 묘유를 체험하려면 현상세계가 분별된 차별성이 아니라 근원적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묘유를 경험하려면 진공의 세계를 경험해야 하니 진공과 묘유는 둘이 아닌데 왜 따로 해놓았습니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고산 스님 왈 “하나인 것 같지만 둘이고, 둘인 것 같지만 하나이다. 네가 아직 그것을 몰라서 그런다.”고 일러주셨는데,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한번은 봉암사에서 한 철을 나고 찾아뵈었을 때였는데, 공부 진전을 알고 싶으셨는지 공부한 것에 대해 ‘일러봐라’하시는 것이다.
때에 따라 기분이 참 좋고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하는가 보다 싶을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내가 이렇게 무지했구나 싶어 주저앉아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 생겨 울기도 했고, 환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일러봐라 하시니 이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스님 부처님 기본 교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별달리 이를 것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물어주십시오” 했더니 스님은 “더 쉬어라”고 하신다.
뭔가를 체험한 듯 우쭐해지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었지만 그보다 더 가슴에 와닿는 말은 없었다. 항상 은사스님의 한마디는 이암 스님에게 큰 영향을 준다.

사실 어려서는 은사스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6살 때부터 절에서 살았다. 비구니스님이 데리고 있다가 법주사에 가 거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6년 과정 중 3, 4년쯤 다녔던 것 같단다. 당시만 해도 학교교육을 중시하지 않았던 때라 스님들이 귀엽다며 데리고 가서 한 1년 데리고 있다가 귀찮아지면 다시 큰절에 데려다 놓고, 또 다른 스님이 데리고 갔다가 주위에서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라는 말에 다시 큰절에 데려다 놓곤 했으니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14살에 고산 스님께 와서 15살에 비구계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해인사 강원에 들어갔다. 은사스님께 매도 많이 맞았다. 그때는 내가 부모가 없어 저렇게 때리나 싶어 미워했고, 스님 돌아가시면 절을 나갈 것이라는 생각도 했단다.
그래서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다 내 얘기 같고 사실은 부족하단다. 42년을 절에서 살았으니 드라마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동진출가한 스님들이 환속을 했지만 스님은 남아 있다. 그동안의 그 많은 갈등과 번민을 녹이고 지금에 이른 데는 나름의 오기도 가세했다.
낳을 때는 축복받지 못했을지라도 죽을 때는 제대로 죽어야지 하는 것이었다. 정말 잘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단다.
“진수는 무향이고 천의는 무봉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려 해요. 이렇게 잡지에 상을 낼 것도 없는 사람이 드러내는 것도 사실은 욕먹는 일인데…….”

스님은 마산 창원 진해 즉 산해원시민연대인 열린사회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전에 부산에 있을 때는 정토학당 하다 부산불교사회교육원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시민운동에서 말하는 인권은 불교의 평등 불이사상, 무아사상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스님은 해석한다.
총무원 사회국장으로 있을 때는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제안해 종책사업이 되기도 했다. 깨달음의 세계가 생활 속에서 구체화되어야지 불교가 수행자 안에서만 있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암 스님의 생각이다. 깨달은 이가 평화로움으로 표현될 때 진정한 안내자가 될 수 있기에. 선은 이 모든 것을 말로, 논리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 깊이 사무쳐 그것을 바탕으로 실천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스님은 생각하고 있다.
요즘 사회통합을 이야기하지만 통합은 나에게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그 자체를 인정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평화이다. 통합은 상대를 내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진정한 통합이요. 깨달음의 세계가 아니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