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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진리 -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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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최훈동 2004년 10월 272호
연구소에서 ‘니까야 산책’이라는 이름의 초기경전을 읽는데 참석자 한 분이 니까야라는 곳에 여행가서 산책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하여 모두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때 내면적인 것마저 외부로 투사하여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외적 세계는 물론 내면세계까지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이러한 외재화 경향은 흔히 변명과 책임전가, 자기합리화 등으로 모습을 나타내지만, 은밀하게 투사되는 경우에는 투사되었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정신의학적으로는 환청과 환상이 그것인데 환자들은 현실로 굳게 믿어 병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이것을 종교계에서는 귀신의 현상으로 해석해왔던 것은 동서고금에 차이가 없다.
꿈도 액면 그대로 믿거나, 내가 잠든 사이에 귀신이나 혼령들이 내 의식으로 침입하여 꿈을 만든 것으로 믿는다면 지극히 외향적 태도이다. 정신치료에서는 드러난 꿈의 이면에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그 의미를 알아가는 작업이 꿈의 해석이고 정신치료이다. 꿈은 자신이 연출가요 작가이며 배우이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면의 갈등들이 여러 상징화 과정을 거쳐 꿈이라는 작품으로 출현한다는 통찰이 확실해진 것은 불과 100여 년에 불과하다. 이렇게 수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것은 그만큼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무의식)을 신과 유령의 세계로 신성시하려는 경향성이 뿌리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종교 경전에 나타나는 상징과 은유를 외향적으로 해석하면 신비와 기적으로 신봉된다. 미신과 이단 종교의 서식지이고 우상화의 원천이기도 한다.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신의 권위에 도전하여 홀로 서기를 하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 실현하기 어려운 내적 성찰이 2600년 전 붓다에 의해서 확고하게 정립되었음을 니까야는 보여준다. 신화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던 그 시절에 어떻게 그러한 통찰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놀라울 뿐이다. 정신치료에서 투사라는 방어기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므로 심리분석을 받기 전에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붓다께서도 이러한 내면의 흐름을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명의 번뇌에 휩쓸리게 된다고 하신다. 신화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이성의 힘으로 분석 통찰하는 인간을 신앙지상주의자들은 신을 거부하고 모독하는 악의 무리라 비난한다. 그 비난 속에서 우리는 지독한 오만과 독선, 이기적 욕망과 섬뜩한 분노가 꿈틀거리는 걸 볼 수 있다. 붓다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욕망과 분노가 악마(마라)이며, 생로병사 현상이야말로 우리를 일깨우는 천사들이라고 역설하신다. 상윳따니까야에는 붓다께서 아난다와 산책하시다가 탑묘의 아름다움을 칭찬한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그분이 탑묘를 칭찬하셨다 하여 불탑 신앙의 근거로 삼기도 하지만, 바로 다음 구절을 읽으면 탑묘를 칭찬하신 의도가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분은 ‘마음에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탑처럼) 쌓으라’고 아난다에게 이르시고 있다. 심리분석의 관건이 되는 것도 올바른 해석인 것처럼, 경전의 올바른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치유와 아픔, 밝음과 어두움이 이로부터 갈리기 때문이다.
바라문들이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며 죄업을 씻는 의식에 대해 “갠지스 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음을 다스리는 물 없는 목욕을 하라”고 그분은 이르신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기념비적 선언은 역시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열반에 드시기 직전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누구를 의지해야 되느냐고 여쭸을 때 “자신에게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결코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하신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뜻밖이다. 번뇌와 두려움의 파도에 휩쓸리는 중생들은 무엇을 섬으로 의지해야 될지 막막하기만 한데, 그러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항상 상주하는 신적 존재는 없다고 거듭 말씀하신다. “형상이나 음성으로 여래를 보려는 것은 헛되고 잘못된 것이라 여래를 볼 수 없다.” 이 말씀은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지극히 실망스러운 대답이다. ‘감각기관에 의해 접촉되고 인식되는 것으로서 여섯 감각의 영역(六入處)이 세계’라고 설파하신 구절에 이르면 이 세상마저 투사된 그림자임을 알 수 있다. 우주의 끝을 걸어서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처님의 대답은 “아무리 빠른 수단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도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몸 안의 세계를 소멸시키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깨달음도 이 여섯 감역을 잘 다스리고 지켜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계행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유언의 의미가 선명히 다가온다. 불교는 신앙의 외향적 경향을 내향적 태도로 전환시킨 혁명적 종교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종교의 외향화가 극을 달리고 있는 가운데에도 세계적으로 명상의 열기가 높아져 가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회귀이다. 물질적 웰빙이 정신적 웰빙과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한 현대인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법당을 대중들의 명상 공간으로 적극 개방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이제 불교 신행도 주술의 껍질을 벗고 삶 속으로 녹아들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을 직접 다스리는 다양한 명상프로그램을 개발함과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밝히는 일에 불자들이 적극 앞장서서, 수행과 포교가 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길을 터야 한다.

‘자신을 의지하라’는 것은 곧 ‘자신을 성찰하고 다스리라’는 것.
선가의 회광반조廻光返照도 밖으로만 향하는 주의를 안으로 돌려 자신을 성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