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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사 혜국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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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05월 159호
부드럽지도, 그렇다고 억세지도 않은 도톰한 금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석종사는 이 골짝 저 골짝이 모두 사과밭이었다. 곡우에 비가오면 풍년이 든다는데, 그럴 기미는 없어 보였지만, 거름을 묻었는지 흙냄새가 구수하고도 따뜻하여 그 서운함을 씻고도 남음이 있었다.
천하없는 장사라도 사과나무는 뽑지 못한다고 했다. 고집스럽게 생긴 나뭇가지를 보면 그럴싸하여 고개가 끄덕여지거니와 그 억센 기운을 녹이기라도 하듯 가지마다 꽃망울이 달리어 터지기 직전이었다. 만발한 사과꽃이라. 생각만 해도 생침이 넘어가게 황홀하였다.
해국스님이 충주서 사, 오 킬로미터쯤 떨어진 창룡사와 그리 머잖은 곳인 이 곳 석종사에 머문 지는 십 년쯤 된다. 산수유 꽃이 여염집 담 위로 곱게 핀 이 곳까지 오르는 길은 제법 구불거리지만 ꡒ좋은 절터ꡓ라는 기대를 가질 만한 지세는 아니었는데, 막상 이 곳에 이르러 , 세 채의 요사채 가운데 ꡐ임시 법당ꡑ으로 삼고 있는 맨 위채에서 내려다보니ꡐ이런 터가 있었네ꡓ 싶게 깊은 산 맛과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을 함께 갖춘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남극성이 보이는 몇 안 되는 절 가운데 하나로, 그 옛날에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사찰이었다고 했다. 죽정사라는 이름으로 신라때 창건되었으나 스님이 이 곳을 찾았을 때는 석탑의 기단과 맨 아래 부분의 탑신 정도가 폐사지임을 일러주는 유일한 것으로 한 때는 일백오십 명의 스님들이 상주했던 곳이라고는 믿기 힘든 곳이었다.
스님의 매운 눈이 이 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은 비단 양양한 터뿐만이 아니었다 그때에 다른ꡐ필요ꡑ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의 대여섯 상좌 가운데 큰상좌에게 그 해 망월사에서 한철 함께 보내자고 전갈을 띄웠는데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 상좌의 속가 형제가 아홉이나 되었는데 다 죽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의지할 데 없는 노모를 어쩌지 못하여 그의 발길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혜국스님은 상좌의 어머니를 자신이 대신 모시겠다고 나섰다. 열셋에 출가한 뒤로 한번도 모셔 보지 못한 체 어머니 대신에 그 분을 모심으로써 제자의 도를 이루게 하리라 마음 먹은 것이다. 그래서 그 때 돈으로 평당 칠백 원씩에 삼천 평을 사들였다.
그러고는 ꡐ이왕 이라 된 일“이라 하나 있는 자식을 산문에 들인 같은 처지의 노인 대여섯 분을 더 모시었다. 그래 놓고 보니 너무 호젓하여 부모 없는 아이들도 데려다 놓기 시작하였다.
ꡐ내가 어려서부터 절밥 얻어 먹은 것 그렇게라도 갚아야지요ꡓ
그 옛날에는 귀한 일이 아니었으니, 혜국스님은 나이 열셋에 “짧은 명기루려고“ 해인사로 보내졌다. 부모님은 아들이 열아홉만 넘기면 무탈해질 것이라고 믿고 그 때까지만 절밥을 먹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ꡒ혹 삼일, 혹 오일, 혹 칠일이면 득도할 줄로 알고ꡑ 열댓살 먹을 무렵 일타스님을 은사로 수계를 하고 불도에 몸 바칠 각오를 했다. 그렇지만 스무살을 갓 넘길 즈음에 선방에 들게 되기까지는 학교를 다녔다. 글을 읽는다 했지만 ꡒ제쳐 놓은 세월ꡓ로 친다. 자신은 대학물까지 먹었지만, 어디까지나 수행 위주라야지 속가공부는 ꡐ벌 이익이 없는 짓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방에 들어서 전강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탔다. 그런데 그 뜻을 두고 전강스님은 “판때기 이빨에 털 난 것ꡓ 이라고 했고, 경봉스님 , 성철스님은 ꡒ앞니빨에 털 난 것ꡑ이라고 달리 풀었다. 이제는 화두가 “형이하학적인 현상계가 생기기 이전의 근본 진리로서 , 그것이 지니고 있는 암호가 문제이지 ꡐ글자’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 어린 마음에는 어느 쪽이 틀려도 틀린 듯하여 전강스님에게 여쭈었다가 혼이 난 뒤에 해인사로 갔다.
그 무렵 열세살 적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써 온 일기도 불태워 버리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정진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성철스님의 권을 받고 장경각에서 오천배씩 삼칠일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회향 마지막 날 마음이 가라 앉으면서 새로운 각오가 솟구쳤다.
ꡐ이 몸을 부처님께 바치오이다. 당신의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고 당신의 말씀대로만 살겠나이다ꡑ혜국스님은 그 자리에서 오른손의 엄지와 약지를 뺀 나머지 세 손가락을 연비를 했다. 뼈만 남기고 손의 설이 다 타 버릴 때까지 육신을 태우는 일이란ꡐ삼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연비를 마친 다음 걸망 하나 메고 해인사를 등지고 나오자니 , 이상도 했다. 하늘은 맑은데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업장을 다 씻어 주는 듯한 상쾌하고 시원한 비였다. 그 길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갔다.
71년 가을이었다.
솔잎, 쌀, 콩 따위로 생식을 하며 그 해 겨울을 넘긴 이듬해 봄이었다. 하도 배가 고파 뜯어 먹은 산나물이 초우라는 독초였다. 배를 칼로 끊는 듯한 아픔을 느낀 순간 그에게 신비스런 일이 펼쳐졌다. 그는 바로 물 건너 제주도에 사시는 어머니 곁에 가 있었다. 쌀의 뉘를 고르고 있던 어머니는 자신이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ꡒ웬 찬바람이 이리 나는고?ꡑ하실 따름이었다. 그러다 자신은 또 금방 광양 송암스님한테 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암 스님도 자신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뒤이어 그는 바로 태백산으로 갔다. 그 때에 봄만 되면 산삼을 캐러 다니는 아는 처사 두 분이 어떤 사람을 등에 업고 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희한하게도 자신과 생김새도 입성도 똑같은 놈이었다. 두 처사는 그놈을 덕석에 눕혀 놓고 놋 숟가락 자루를 이빨 사이로 디밀어 입을 벌리려 하고 있었다. 그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과 똑같이 생긴 놈이 없어졌다. 동시에 처사들은 정신을 잃었던 스님이 “아까 그 놈 어디 갔지ꡓ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였다. ꡒ유체이탈”의 이 일은 혜국스님에게 ꡐ재출가ꡑ의 계기가 되었다. ꡒ그렇구나.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니로구나. 불교에서 이르는 주인공, 또는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구나” 그 일 뒤로 크게 발심이 되어 “참으로 크게 애쓰면서ꡓ 그 곳에서 세 해를 지냈다. 그리고 ꡒ이만하면 됐다ꡑ 싶어 성철, 경봉, 구산스님을 뵈었다. 그러나 세 분 다 “애쓰기는 했는데 깨달은 경지는 아니라”고 했다. 지당하기 짝이 없는 그 말씀이 그 때에는 퍽 섭섭하게 들렸다. 평상시에 반드시 모시는 스승 한 분이 있어야 한다고 수좌들에게 이르는 것은 그 일 때문이다. 스승은 상봉에 이르는 길 가운데 저마다 자신이 걸어 온 길만을 말해 주게 되는데,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 길이 제각기 달라보이기 마련이다.
자신은 한몸인데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아들도, 동생도, 스님도 되듯이, 그 다른 호칭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았다 싶어지면 그 하나인 스승에게로 가서 “점검ꡓ을 받아야 착오가 없다. 그 스승은ꡐ인가 받은 선지식’ 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도솔암에서 나온 그를 구산스님이 붙잡았다.ꡐ여기서 너는 참선을 해야 한다ꡑ혜국스님은 그 뒤로 해인사 스님이 아닌 송광사 스님으로 알려질 만큼 송광사에서 오래 머물렀다. 성철스님이ꡐ가을의 찬 서리“ 같은 방법으로 수좌들을 가르쳤다면 구산스님이나 일타스님은 ꡐ새싹을 틔우는 훈훈한 봄바람ꡑ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그는 회상한다. 오랫동안 선원에서 입승 소임을 보았던 스님은 ꡐ내 몰아쳐 앞으로만 나가게 한다ꡑ는 뜻에서 “기차 앞발통”이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는데, 뜻밖에도 그 부드러운 방법이 대단한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모자라는 부분이라는 뜻이리라.
구산스님은 밤중에 인삼과 대추달인 것을 손수 가져와서 미루에 놓아두고 방문을 똑똑 두들기고는 돌아가시곤 했다. 귓병을 호되게 앓아 주위로부터 죽을 거라는 수근거림을 듣기도 하던 어느 때에는 광양의 깊은 산속까지 약을 지어 그를 찾아 오시기도 했다.
또 오실까봐 황망히 제주도로 토굴을 옮겼는데 거기까지 찾아오셔서 그를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그 은혜를 못 잊어 지금도 그는 동짓달 열 사흘인 구산스님의 제사를 혼자서 따로 모신다. 스무 해 가까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기도 했거니와, 책 읽기를 좋아해서 선승보다는 학승이 제 길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으니 , 그를 참선 쪽으로 내몰던 일타스님의 은혜도 잊을 수가 없다. 내일 모레 강원을 졸업하게 되는 당신의 상좌들에게도 “그짓 그만두고 선방 가거라” 하고 이르던 분이셨다.
그는 전두환 집권 시절의 10.27 법난 때에 보안사로부터 되돌려받은 관음사 주지 노릇을 여섯 달 동안 한적이 있는데, 일타스님은 ꡐ참선 수좌는 참선만 해야지 , 주지 노릇은 당찮다ꡓ고 공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시정의 8대 기관장과 신도들로 초만원을 이룬 법회자리에서였다. 듣는 순간에는 무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밤중에 혼자 생각해보니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그 길로 주지 자리 사표를 내고 원적암으로 내려간 일도 있었다.
일타스님의 혜국스님에 대한 이처럼 유별난 참선 권유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으니 , 혜국스님이 전생에 노장의 은사였던 고경스님이라고 믿어서였다.
고경스님은 통도사의 대강백으로서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쯤 전에 입적하신 분이다. 입적하기 한해 전에 금강산 마하연에서 딱 한 철 참선하고 내려온 뒤 바로 앓아 누웠는데, ꡒ충공아 - 충청도 공주 태생인 일타스님을 두고 즐겨 부르던 이름 - 내가 평생 강사로서 글만 가르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구나. ‘강ꡑ자가 얼어죽을 ‘강ꡑ자로다” 하며 참선을 멀리 한 삶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은 ꡒ물 건너에서 다시 태어나 오로지 참선만 할 것ꡓ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연인지 혜국스님은 고경스님이 입적하신 이듬해에ꡒ물 건너ꡓ인
제주도에서 태어났는데 생일도 똑같다. 이미 문중에서는 그것을 “사실ꡓ로 믿게 된 이야기가 많거니와 불 같은 성격과 작달막한 키까지 닮았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이 생에서는 원 없이 참선만 하실 것이라더니 , 그래서인지 , 세수가 마흔 아홉인 그의 운수 행각은 지금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는 만큼, 나라 안의 제방선원을 두루 다녀 안 가본 선방을 꼽기가 더 수월할 정도이다. 그 가운데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도솔암, 칠불암 등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 그의 도반들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선방에 다니는 스님은 거의 없다. 그런 만큼 선이나 선방에 대한 스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법했다.
현재 보편적인 선방 형태를 이루는ꡒ큰방”식이 바람직하다고 그는 말했다.ꡐ선방은 무언의 교육장입니다. 같이 생활하는 대중들에게 서로 배우는 셈이라요ꡑ
사오십 명쯤되는 스님들이 한방을 쓰다보니 누울라치면 서로 머리가 맞닿을 정도인 데다, 정진하면서 조는 스님들의 코 고는 소리, 발고린내, 땀냄새 등이 또다른 망상을 지피게 한다고 생각하는 스님도 있지만, 혜국스님은 그런 환경이 ꡐ이겨내야 할’ 부분이지 ꡐ피해야 할ꡑ 부분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몸속에서 치미는 기를 제 스스로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ꡐ선방을 나는 ‘바다’ 로 봅니다. 제 성을 모두 놓아 버리고 모두 석씨가 되는 곳이지요. 낙동강이나 한강, 섬진강이 바다에 이르면 제 이름이 없어지고 모두 한바다가 되는 것과 같아요. 바다에 와서 짠맛 하나로 물 들어 가는 것이 참선이라요. 정진중에 일어나는 망상은 ‘틈입자’ 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만들어 둔 것입니다. 전생에 아들 딸과 가족해서 살면서 기도했던 것, 그 염력이 남아서 떠오르는 것이라요. 그 망상은 맞서서 싸워 없앨 것이 아니라 화두로 돌려야 합니다. 깜깜한 밤을 밝히는 방법은 어둠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일이 아니라 스위치를 올려 불이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어둠이란 절대 존재가 아셔라 광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스님이 스물두살 때 연비를 하면서 “손가락 있을 때” 마지막으로 써 둔 글귀가 있는데, 서른다섯 때까지는 개인 정진에 힘쓰고, 마흔 다섯까지는 결제 때는 참선을, 해제 때는 이타행을 아우르고, 그리고 그 뒤에는 후학 지도에 힘쓰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른 다섯 무렵에 그것을 다섯 해씩 미루었다. 절에서 노인들과 아이들을 거두는 것은 그의 이런 작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다짐대로라면 이제 인생 삼등분의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 셈이겠는데, 큰절로 가서 후학들을 지도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이 곳 석종사에 선원을 하나 세울 작정을 하고 있다. 정진중에 잠이 오면 나가 거닐 수 있는 포행처가 있는 선방이다.
혜국스님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오는 초파일에도 아이들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촛불놀이를 벌일 예정이다. 자기를 위한 불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나 스승, 또는 자신보다 처지가 딱한 사람들에게까지 두루 광명이 미치게 하려는 마음을 담은 불어다. 그리고 올 해도 그 아이들에게 거듭 이를 것이다.
ꡐ초는 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느니라.ꡓ
사과꽃 그 무렵이면 절정이리라. 그러나 아이들이 켜 든 촛불은 그 꽃보다 더욱 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