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회들이 만약 종지를 성취하고자 하거든 모로미 일상삼매 一相三味와 일행삼매一行三味를 통달하라. 만약 일체의 자리에서 상相에 머물지 않아서 저 상 가운데 있으면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또 취하고 버릴 것이 없어 이익과 성취와 무너짐 등의 일을 생각하지 않아서 평안하고 한가롭고 조용하고 고요하며, 비고 통하고 맑고 깨끗하면 이것을 일상삼매라고 이름하니라. 만약 일체의 자리에서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순수하고 한결같고 곧은 마음으로 도량에 움직이지 않고 참으로 정토를 이루면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이름하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두 삼매를 갖추면 마치 땅에 종자가 있어 품고 감추고 오래 길러서 그 열매를 익게 함과 같으니 일상과 일행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마음의 땅이 온갖 종자를 머금어
널리 비 내리면 모두 싹이 트리라.
문득 깨달아 꽃이 정을 다한다면
깨달음의 열매가 절로 이루어지리
心地含諸種 普雨意皆蘭
顆悟花情已 菩提果自成
일찍이 혜능조사는 {금강경} 가운데ꡐ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而生其心)ꡓ라는 구절에 이르러 쾌 깨닫고 모든 만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오도시를 노래하였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깨끗함을 기약하리오?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기약하리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짐을 기약하리오?
어찌 지정이 본래 스스로 동요 없음을 기약하리오?
어찌 자성이 능히 모든 법을 낼 것을 기약하리오?
何期自性 本自淸爭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本無動搖
何期自性 能生萬法
활연히 대오한 혜능조사의 ꡐ무주생심無住生心’ 은 분명 오도悟道의 한 모범이 되었다. 자성은 본디 청정한 불성이 아님이 없는데 점차 청정함을 잃고 청정하기를 갈구하며, 자성이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생멸을 초월하려고 하며, 자성이 본디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는데 외경에서 갖춤을 구하며, 자성이 본래 동요됨이 없는데 동요함이 없음을 구하며, 자성이 그대로 만법이거늘 만법을 내기를 기약하겠는가?
태고국사太古國師의 다음의 게송은 이러한 각오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하나라도 얻음이 없는자리
집안의 돌마저 밟아 깼구나.
돌아보면 깨어진 자리 없고
보는 사람 역시 벌써 없어라.
그대로 드러나 둥그런 모습
그윽히 빛이 밝고 눈부셔라.
부처님과 조사와 산과 대지
입도없이 모두 삼켜버렸다.
一亦不得處 踏破家中石
回看沒破跳 看者亦已寂
了了圓院院 玄玄光樂樂
佛祖與山河 無口悉呑却
하나라도 마음자리에 얻음이 없는 절대무의 경지에서 집안의 돌이라는 허상을 깨고 원명圓明한 불지견에 들어갔음을 나타내고 있다. 태고국사는 33세가 되어 감로사에서 7일 동안의 참선 끝에 문득 깨달음이 있었다고 한다. 집안의 돌에 장애를 일으키지 않고 밟아 깼다
는 자체가 오도의 압권에 해당한다. {선문염송}에 의하면 육긍陸亘 대부가 남천南(泉)에게 묻기를, “저의 집에 돌 한 개가 있습니다. 그것에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합니다. 이것에 부처님을 새길 수 있습니까?” 하자 ꡒ있다”고 대답하였다. 다시 ꡒ안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ꡒ안된다”라고 대답하였다. 운암 雲岩은 이에대해 앉으면 부처요, 안 앉으면 부처가 아니라고 했고, 동산 洞山은 안 앉으면 부처지만 앉으면 부처가 아니라고 했다. 이는 바로 혜능 조사의 ꡐ무주생심無住生心’ 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것이다.
백운선사는 〈송인낙가산送人洛迦山〉에서 자성이 만법임을 노래하였다.
미묘한 본체 본래 처소가 없으니
관음이 어찌 바다 동쪽에 있으리.
어느 곳 청산이 도량이 아니던가
어찌 하여 다만 낙가산을 찾으리.
妙體由來無處所 觀音豈在海門東
何處靑山不道場 何須特禮洛迦山
인도의 낙가산은 관음보살이 성주하는 곳이기에 영지 靈地로 간주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낙산사가 생겼던 것이다. {유마경}에서 밝히고 있듯이 직심直心, 발행發行, 섬심深心, 보리심,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자비, 희사喜捨, 신통, 해탈, 방편, 사섭四攝. 다문多聞, 복심伏心, 삼십칠품三十七品, 사제四(제), 십이연기, 무명번뇌, 중생, 일체법, 항마降魔, 삼계三界, 사자후,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삼명三明, 일념지일체법一念知一切法이 모두 도량이라고 하여 그야말로 일체가 진여의 도량이 아님이 없거늘 어찌 낙가산에 집착하느냐는 것이다. 자성이 곧 구족具足이요 만법임을 알아야 진정한 각오의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대경에 주착함이 없이 보리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무명의 껍질을
벗고 마음의 해탈을 이루면 어느 청산, 어느 곳인들 영지靈地가 아님이 없고, 정토가 아님이 없거늘 우매한 중생들은 오로지 먼 곳에서,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다음의 나옹 왕사의 〈계추우작季秋偶作〉은 바로 청정한 자성으로 만물을 관조하며 자성이 만법임을 노래하였다.
가을 바람이 한 바탕 뜰 안을 쓸고가니
만리에 구름 없는 푸른하늘 드러나네.
상쾌한 기운 조금 젖어 저절로 싱쾌하고
눈빛 점점 맑아지고 닐아가는 기러기떼.
밝디 밝은 이 달은 나눠주어도 끝없는데
뚜렷한 보배로운 산 그 수도 무궁해라.
만물은 본래 제자리에 편안히 놓여있고
집안 가득 가을빛 반쯤 푸르고 붉구나.
金風一陣掃庭中 萬里無雲露碧空
爽氣微農人自快 障光漸淡雅連通
明明寶月分難盡 歷歷珍山數莫罷
法法本來安本位 滿軒秋色半靑紅
만리에 구름 없는 청정한 벽공碧空과 같은 자성은 밝디 밝은 보월寶月처럼, 뚜렷한 진산珍山처럼 ‘법법본위法法本位ꡑ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법법’은 동요됨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은 본위를 잃고 눈 앞의 대상에 동요되는 것이다. 달과 산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이 무궁하기만 하다.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지만 바로 ‘득得ꡑ 에 집착하여 ‘득ꡑ의 장애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푸른 대와 국화는 바깥의 경계가 아니요, 흰 구름과 밝은 달은 온전한 진리를 드러낸다{翠竹黃花非外境 白雲明月露全眞)”라고 한 것처럼 낱낱의 만물이 탐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라 자성의 진실한 이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장애와 집착을 쓸어내고 청허한 직심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나옹 왕사의 오도시는 청아한 품을 이루고있다.
정관 대사靜觀大師의 〈중상금강대重上金剛臺〉에는 이러한 만유의 상을 초월한 선정 속에서 ‘법법ꡑ이 본위이고 자성임을 깨닫는 소리가 형상화되었다.
높은 누대에 조용히 앉아 잠 못 이루고
쓸쓸한 밤 외로운 등만 벽에 걸렸구나.
때 맞춰 좋은 바람 방문 밖에 불어오고
문득 뜰에 떨어지는 솔방울 소리 들린다.
高臺靜坐不成眼 寂寂孤燈壁裡懸
時有好風吹戶外 却聞松子落鷹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