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승려의 눈에 비친 회창의 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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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05월 159호
회창의 폐불 또는 법난이라 일컬어지는 중국 불교사에서 세번째의 법난 관련 기록들을 조사하면서 당시의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던 외국 승려의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의 승려인 엔닌圓仁(794~864)이 그의 나이 마흔 다섯 때인 838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847년 귀국할 때까지 중국의 실상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이다. 이 책에는 엔닌이라는 스님이 당시 중국의 불교와 사회상 등을 기록해 놓은 단순한 일기 형식의 기록서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중요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엔닌은 일본 시모시케국(下野國) 쓰가군(都賀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불심이 돈독하여 히에산(此督山)에 들어가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쪼(最澄) 스님 밑에서 수행을 하고 뒤에 사이쪼 스님을 이어 일본 천태종의 일인자인 고승이 되어 활약하다가 마혼다섯에 견당선遺唐船을 타고 당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십 년쯤 중국에 머물면서 그는 최후의 순간에 임박해서도 자신의 목숨보존보다는, “환속되는 것이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사한 불경들을 가져가지 못할까 걱정스러웠다”며 구법승으로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여 책을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했다. 회창의 법난을 다른 여러 관련 서적들을 통해 전개하는 것보다 엔닌의 기록을 토대로 중국 불교사의 세번째 법난을 다루어 본다.
보통 회창의 법난은 845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엔닌의 기록에는 842년, 회창 2년부터 시작된다.
▶ 회창 2년 3월 3일, 이덕유 재상의 비구와 비구니에 다한 조규條規 상소가 천자에게 받아들여져 외국승과 승적에 오르지 않은 승려들의 추방과 동자를 사미로 둘 수 없다는 칙령이 내려졌다.
▶ 6월 11일 천자의 생일에 도교와 불교와의 논쟁이 천자 앞에서 벌어져 도사 두 명은 황제의 하사품인 자색 옷을 받았으나 스님들은 받지 못했다.
▶ 10월 9일에는 사실상 법난의 시작을 알려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 전국에서 야금술治金術, 주술, 금기를 아는 사람, 군대에서 탈영하고 절로 숨어든 사람, 몸에 몽둥이로 맞은 흔적이 있거나 조문鳥文(범죄인에게 먹물로 새긴 문신)이 있는 사람,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사람, 일찍이 음행을 저지른 사람, 아내를 거느린 사람, 계율을 지키지 않은 비구와 비구니 들은 모두 환속한다. 만일 비구, 비구니가 돈, 곡식, 토지, 장원을 가지고 그것들을 잃는 것이 아까워 환속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의 뜻에 따르되 두 배의 세금과 부역에 처한다. 엔닌은 이 칙령을 별도로 기록하면서 성안 좌, 우가의 공덕사가 각 절에 공문을 보내어 비구와 비구니 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절의 문을 오래도록 잠가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1차 회창법난이라 일컫는 이 사건은 승려 현현이 천자에게 글을 올려 자기사 검륜 劒輪(악마에게 항복받기 위하여 사용하는 비법)을 지어 회골국(위구르)을 타도하겠다는 글을 올렸으나 재상 이신李紳의 상소에 의해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천자를 속였다는 이유로 처형되면서 일어났다. 이에 따라 무종은 칙령을 내려 전국의 사찰에 대해 재산과 승려의 수를 일제 조사케하고 재산 보전을 이유로 환속을 원하는 승려는 환속시켜 중과세를 부과시켰는데, 이때 흰속한 승려는 삼천오백여 명에 이르렀다.
▶ 회창 3년 6월 11일 천자의 생일에 불교와 도가가 무종 앞에서 논쟁을 벌였으나 이 논쟁에서 도가만이 천자 하사품인 자색의 옷을 받았다. 또 천자의 생신을 맞아 태자 첨사인 위종경이 천자에게 「열반경소」 스무 권을 올렸으나 그는 이를 살펴보고 모두 불태워 버렸고 위종경의 집을 수색하여 열반경소의 초고도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했다.
▶ 회장 4년 2월 무종은 대주의 오대산, 사주의 보광왕사, 종남산의 오대, 봉상부의 법문사에서 해마다 있어 온 부처님의 손가락 마디의 사리 친견을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는자를 처벌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 4월 1일부터 시작되는 도교의 천존에 대한 제사가 시작되자 무종은 불경을 불태우고, 불상을 부수고 승려들을 본사로 돌려보냈으며 부처님을 모신 도량에 천존의 상을 안치시켰다. 또한 이 해 황제 생일에는 불교와 도교의 대덕 초청 논쟁을 도가측만 불러모은 채 실시했다.
▶ 7월 보름을 맞아 백중 행사를 각 절에서 봉행하며 불전 앞에 온갖 공양물을 올렸지만 무종은 여러 절에 안치된 공양물들을 모두 도교의 홍당관으로 옮겨 천존에게 바치라는 칙령을 내린다. 그러나 백성들은 무종의 그러한 조잡한 행태에 심한 반발을 보이며 무종이 도관으로 행차하자 백성들은 “부처님께 공양한 것을 빼앗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누가 기꺼이 나가보겠는가”라며 무종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 달에 천자는 또 장나과 전국에 있는 수도처와 불당, 묘탑 등을 모두 파괴시키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이 해 들어 유난히 가뭄이 심하자 승려들에게 명하여 기우제를 지내게 하고 이에 비가 내리면 도사들에게 상을 내려 성 안의 사람들이 ꡒ기우제는 스님들만 들볶을 뿐 포상은 도시들에게만 돌아간다”고 빈정댔다.
▶ 10월 천자는 다시 칙령을 내려 전국의 작은 절들을 모두 파괴시키고, 50세 이하의 모든 비구, 비구니의 환속을 명하며, 절에 있던 종은 도사관으로 옮기라고 했다.
▶ 회창5년 3월 무종은 50세 이상의 승려들도 모두 환속할 것을 칙령으로 발표하면서 도가의 선대를 쌓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를 메꾸기 위해 승려들을 좌군에 집합시켜 모두 처형한 뒤 그 머리로 구덩이를 메우라는 칙령을 내렸으나 검교추밀사의 진정으로 집단 학살의 음모는 무산되었다.
▶ 이해 4월부터는 외국 승려들도 환속시켜 추방을 시키도록 했다.
▶ 회창 6년 3월 23일 중국 불교사에서 최악으로 기록될 법난을 자행한 무종은 몸이 썩는 병으로 최후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