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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부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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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병주 1995년 05월 159호
불교에 대해 막연하게 호감을 갖고 있던 나는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면서 얄팍한 꾀를 한가지 부렸다. 기독교 대학이기에 누구도 거쳐갈 수밖에 없는 예배 시간과 기독교 개론 시간에 기독교 교리 공부를 하고 불교에 대한 공부는 내 스스로 함으로써 두 종교를 비교 분석한 뒤 한 종교를 선택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 불교를 처음 접한 나에게 선배가 던진 물음은 불교적 표현을 빌자면 화두가 되어 지금도 나에게 끊임없는 문제의식을 던져주면서 내가 불교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고 지금도 불교일을 하게끔 하고 있다. 그 물음은 ‘이 시대의 부처님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실천을 하실까’ 라는 것이었다.
과연 이 시대에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부처님 오신 뜻을 되새기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탄생을 찬탄하는 마음과 연등을 만들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오신 뜻을 자신의 현재 상황과 시대적 요청에 맞게 재해석하여 실천하는 알찬 행사를 보기란 쉽지가 않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가 대부분이 기복적 신행에 머물러 불자들이 주인으로 참여하지 않고 일회적인 봉축 법회를 봉행하는 것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이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으로 자리하기에 부처님 오신 날을 맞는 나의 마음은 온통 기쁨일 수만은 없다.
또한 부처님 오신 날이 어느 때부터인가 불교라는 부분 종교의 행사로 전락해 버렸다는 느낌을 떨쳐 버리기가 어렵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축소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놓고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박해하던 이 나라의 정책에서 원인을 찾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종교인들의 극성스러운 노력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웬만큼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원인 분석이지만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은 불교 집안 자체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 오신 뜻에 공감하고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불교집안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반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국민적 축제로 다시 자리잡으려면 다음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누구나 부처님 오신 날을 느낄 수 있는 유형 무형의 확실한 상징물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성탄절에 캐럴과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상징물을 가지고 연말 분위기에 편승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접근할 기회를 만들어 왔다. 이런 접근 방식이 동서양의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면서 선교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용적으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상징물을 개발하여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연등이 상징물로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동일한 형태와 내용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왔기 때문에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양과 형식의 연등 만들기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고, 연등 외에 또 다른 상징물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또 내용적으로는 연등이 사찰의 재정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한 차원 발전하여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로 자리매김을 하여야 한다. 연등에 가족과 개인의 소원만을 담아서 달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의 평안과 조국의 발전된 미래를 염원하는 내용의 등을 달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진리는 우주법계를 가득 채우고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부처님의 제자들이 너무나 작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연등을 보면서 생각해 볼 일이다.
둘째 , 부처님 오신 날의 행사가 가족 단위의 신행에서 더 나아가 자리이타적인 사회적 실천의 장이어야 한다. 현대는 이기적인 가치관과 개인적 기준의 윤리관속에서 점점 삭막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변화되는 사회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 없는 개인의 기복적인 신행은 오히려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에서 어긋나 경쟁과 이기심을 조장할 수 있다. 기존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가 가족과 개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신행이었다면 이제는 자리이타의 사회척 실천의 선행으로 상승시킬 필요가 있다. 가족적 신행이라야 한 집안에서 불교를 믿는 할머니나 어머니를 매개로 한 가족단위의 신행이었지 가족 모두가 불교를 믿는 신행 생활은 아직 정착단계에 있다. 더구나 사회적 차원의 신행 활동은 너무나도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종교에 비해 최대의 신도수를 자랑하는 불교가 복지 시설의 수효는 매우 적다. 물론 사회복지비로 지출하는 절대 액수도 무척 적다. 대자비심에 바탕한 보시를 배우고 수행하는 불교에서 사회 복지에 이렇게 소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요즘은 불우이웃,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의 소외 계층에 관심을 갖고 많은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에 ꡐ지혜로운 사람이 보시를 행함에 보답을 바라고 하지 않으며 , 사후에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하기 위함도 아니고, 선명을 밖에 유포하기 위하여 하지 않으며 삼악도의 고통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가법이기 때문도 아니다. 오로지 타인으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며 , 자기의 연민성 , 자비성에서 나온 것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 소외된 계층을 대상으로 한 행사가 부처님 오신 날을 앞뒤로 전시적이고 일회적 행사로 끝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셋째, 부처님 오신 날 행사는 부처님 오신 참뜻을 되새기는 것이어야 한다. 부처님 오신 참 뜻은 고통 받는 중생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당시 인도는 계급 사회로서 , 끊임없는 전쟁으로 사회가 불안하고 가치관이 혼란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을 사문유관을 통해 알게 된 부처님은 궁중 생활의 안락함을 버리고 고통의 현장으로 향한다. 출가 뒤 고행과 선정주의의 잘못된 수행법을 초발심의 정진력으로 극복하고 깨달음을 이루신다. 깨달음을 이룬 뒤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교화하신다. 수행 과정에서 온갖 갈둥과 유혹을 뿌리치고 깨달음을 이룬 정진력과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생활하다가 길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전법행을 하신 대자비심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런 배움의 마음기짐과 자세가 부처님 오신 날을 맞는 불자들의 가장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는가.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하여 부처님의 수행과 전법행에 관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방송 매체나 각종 법회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나 삶의 태도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단지 소개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처님 오신 뜻을 되새기기 위해 부처님의 생애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행사를 위해 동원되는 말과 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의 모든 내용과 형식은 바로 부처님 오신 참뜻을 배우려는 일 하나로 집중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부처님 오신 날의 행사는 비로소 제 몫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형식과 내용이 채워질 때 부처님 오신 날은 많은 문화적 행사를 동원하여 성대히 치러지는 국민적 축제이자 부처님 오신 참 뜻을 되새기는 종교적 각성의 장이 될 수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활짝 꽃피는 문화의 마당이자 많은 사람들이 불교라는 진리의 바다에 들어오게 하는 포교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ꡐ불교답다는 것은 무엇이고, 이 시대의 부처님은 어떤 모습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늘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점검하는 일, 이 시대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함께 노력하는 일,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반성하고 부처님의 삶을 따라 배우려는 수행자적 자세를 갖추는 일, 이런 것들이 부처님 오신 날을 맞는 불자들이 이 시대의 부처님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 있는 자리에서 시작해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