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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기다리는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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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최정희 1995년 05월 159호
어느 포교사가 자기와 가까운 가톨릭 신도 두 명에게 불교계 신문을 구독하도록 권했다. 그 포교사는 몇 달 뒤 두 친구에게 들은 구독 소감을 흡족한 표정으로 전했다.
“신문을 통째로 삶아서 먹고 싶을 정도입니다”
“나는 그 신문을 안방에 모셔 놓고 봅니다. 방 밖으로 들고 나가면 구겨지거나 분실될까 싶어서요” 불교계 신문이 다른 종교인들에게 이 정도의 반응을 얻고 있다면 일단은 기분 좋은 일이고, 불교언론 가운데에서 ‘신문의 포교 기능ꡑ 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사례가 아닌가 여겨진다.
ꡒ불교언론은 어떻게 포교의 일익을 담당해야 하는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내용인데 신문을 위주로 짧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울타리를 벗어나자
불교언론의 큰 목적이 전법에 있듯 불교계가 신문을 만드는 까닭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법을 믿고 생활 속에 실천하여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도록 이끄는 데 있다. 때문에 불교계 신문의 독자층이 스님들이나 재가불자 등 불교권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불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일반인들과 더 나아가서는 다른 종교인들까지 독자화할 때 불교계 신문은 얼마쯤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계 신문이 비불자 곧 일반인과 다른 종교인들의 시선을 끌고 공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점은 바로 교계 신문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먼저 어렵다고 생각하는 교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주되 그 가르침이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그 결과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12연기 , 4성제, 8정도, 6바라밀, 선들을 이론으로만 해설하기보다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생활법문 또는 현장의 소리로 재조립해서 내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도 관심이 많은 선의 경우 스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생활속에서 공부할 수 있고, 선을 생활화할 수 있음을 입증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 불교의 5계가 왜 사회운동으로 확산되어야 하는지 위기의 현대사회를 구할 수 있는 불교적 해답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교계 신문은 시사문제를 불교 시각으로 풀어서 대중을 이끄는 데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남녀노소, 도시인, 농어민, 광부, 군인 등 각계 각층의 독자를 폭 넓게 확보하는 작업이다. 그러려면 지면이 다양해야 한다. 독자층을 두텁게 형성한 신문은 불교권에서도 환영받기 마련이다.

선지식이며 도반
그러한 신문은 스님들에게 설법 자료, 포교 교재로 활용할 수 있다. 또 재가 불자들은 이 신문을 통해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불자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불자들이 불교를 믿는 것은 깨달음에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기복에 젖어 있는 불자가 대부분이다. 불교언론은 바로 이런 불자들을 바른 신행의 길로 안내하여 보살로 거듭나게 하는 선지식 또는 도반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에 충실한 교계 신문의 각종 기사는 다른 매체의 자료로 쓰이고, 또 기획 연재물은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등 이중삼중으로 전법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교계 신문은 보도 기능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신문의 정치면을 닮은 종무 행정 보도에 지나칠 만큼 지면을 할애하기 보다는 신행과 연관된 교계 소식과 문헌정보 제공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물론 종무 행정을 보도해서 사찰과 신도들이 종단에 관심을 갖게 하고, 종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불자들은 개인의 신행을 이끌어 주는 기사에 더 시선을 주기 마련이다.
어느 절에서 어떤 법회가 열리고 어떤 신행 단체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지 알려주고 동참하게 하는 것은 포교의 첫걸음이다. 또 새로 나온 불서, 베스트셀러 불서 , 화제의 책 등을 소개하고 출판동향 등을 분석하고, 점검하여 보도하는 것도 문서 포교에 동참하는 신문의 역할이다. 미술, 음악, 문학, 영화 등 불교문화 기사는 문화 포교의 길을 열고 닦는 데 큰 몫을
하며 불교문화와 일반문화 예술과의 접목에도 기여한다.
교계 신문의 보도 기능에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보도의 공정성이다. 종단에 분규가 있을 때면 교계 신문은 1면 머리 기사로 대서특필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정성과 비판기능을 잃었다. 또 편집자와 경영진의 이해로 인해 같은 기사라도 전혀 상반되는 해설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교계 언론 발전의 걸림돌일 뿐 아니라 질을 저하시키는 요인이었다. 교계 언론은 언제나 기사를 쓰기에 앞서 신문을 만드는 목적에 비추어 보고, 기사가 활자화됨으로써 교계와 독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도 고려해야 한다. 독자의 눈은 냉정하고 준엄하다. 부처님의 감로 법문을 기다리고 그 실천으로 삶을 윤택하게 하려는 독자들에게 스님들의 분규 기사를 고덕활자 제목으로 보여 준다면 그 언론이 과연 전법 기능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십여 종의 교계 신문
교계 신문들은 교단권익옹호의 파수꾼이다. 이교도의 훼불, 정부의 편향종교 정책 , 불교에 대한 음해에 맞서 교단과 불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 왔다. 최근에도 부활절과 관련된 검정고시 날짜 변경으로 불교 언론은 목소리를 모았다. 그러나 이럴 때 불교언론은 신중히 불교 언론다움을 보일 필요가 있다. 잘못을 인지시키고 적극적으로 시정을 촉구하되 증오에 찬 감정으로 상대와 같은 위치에 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불교 언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실천하는 메신저이기 때문이다.
현재 불교계에는 십여 종의 크고 작은 주간신문이 있다. 불법을 좀더 넓게 전파하기 위해서 신문의 종류가 많음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신문이 그 신문’ 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나올 만큼 특징이 없으면 재정적으로 큰 낭비이다. 또 수준 이하의 신문이 나돌기도 하는데 이런 신문은 전법보다는 오히려 교계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우려가 크다. 때문에 교계의 신문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자기 색깔을 지녀야 한다. 가장 오래된 조계종 기관지 신문은 기관지 성격이 짙다. 그런데 뒤에 나온 신문들이 이 신문과 비슷한 내용을 담는다면 신문 종류가 많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신행, 문화, 여성 , 수행 등 어느 한 분야에 강점을 지닌 개성과 특성이 뚜렷한 신문이 다양하게 발행될 때 전법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여기서 오늘의 불교언론을 바라보면서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분산된 힘을 모아 좀더 규모가 큰 언론으로 발돋움하는 일이다.


공양올리는 마음
ꡐ저는포교사이지 기자가 아닙니다.ꡓ기자라는 직함이 쑥스럽기만하다. 사실 불교언론은 일반 매체와 달라 아무나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신심 깊은 포교사 수업과, 언론을 알아야하는 기자수업을 함께 하는 것이 불교언론의 특징이다. 한마디로 불교언론은 전문 특수인력을 필요로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불교언론은 비불자를 불자화하고 불자를 보살로 만들어야 하는 전법교화의 사명을 지닌다. 때문에 그 구성원들은 원력이 남다르고 불심이 간절할 수 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막중한 전법의 임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불교언론에 몸담은 기자가 단순한 직업인이기를 고집하거나 언론인으로 자부한다면 그는 자격 미달이다.
ꡐ상구보리 하화중생’ 은 스님들에게만 절실한 말이 아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그러해야 하고 불교언론의 구성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한 단짜리 기사 한 꼭지를 쓰면서도 그 기사를 읽을 독자를 생각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자세로 쓸 때에 불교언론은 포교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면 불교언론은 빠른 시대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 정보화시대에 불교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지면으로 보여 줄 때 교계 신문은 발행 목적이 뚜렷한 신문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 신문, 교계 신문이 가야 할 목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