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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의 가르침과 위대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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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5년 05월 159호
아슈밧다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얼마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 훌륭한 가르침을 혼자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을 자각하고 카시국의 수도 바라나시-지금의 베나레스-의 “녹야원” 으로 가서 예전에 함께 고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했다.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 이라 한다.
그 다섯 명이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자 이에 비로소 불교의 출가 교단인 승가僧伽가 성립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부처님(佛)과 진리(法)와 출가 수행자(僧)라는 세 가지 보배, 곧 불, 법, 승의 삼보 三寶가 갖추어져 불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초전법륜은 석가모니의 생애 가운데 네 가지 큰사건, 곧탄생, 성도, 초전법륜,
입멸 가운데 하나이며, 초전법륜이 행해졌던 녹야원은 불교의 4대 유적지
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초전법륜을 이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최초의 설법
이라서가 아니라, 최초로 ‘설법을 했다’ 고 하는 행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가 설법을 하지 않았다면 불교는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남기지 않았을것이며, 나아가 우리가 불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전법륜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뒤로 석가모니는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교화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곳곳에서 고뇌하
는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물음이나 호소에 적절한 비유를 섞어가면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
으며, 석가모니를 만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신자가 되거나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 특히
불교교단은 늘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분에 관계 없이 언제라도
출가 또는 재가신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교법의 은혜를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제한하고 있던 베다종교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제자들 가운데에는 왕족이나 바라문 출신은 물론 도시의 상인계급. 무식쟁이, 심지어는 강도나 거리의 여자도 있었다.
한편 석가모니는 고향 가필라바스투를 방문했을 때 부왕을 비롯하여 사촌동생인 아난, 아
난과 형제로 나중에 석가모니를 반역한 데바닷다 등 석가족의 사람들을 교화했다. 그리고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으며,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 마하파자파티의 간절한 소원으로 처음으로 여자의 출가를 인정했다.
사십오 년이라는 긴 세월에 중인도 각지를 순회하던 석가모니는 자신의 목숨이 다 되었음
을 알고 라자그리하에서 태어난 고향을 향해 북쪽으로 최후의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한 신자의 공양을 받고 식중독에 걸려 쿠시나가라 교외에 있는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유훈을 남긴 뒤 선정에 든 채 입멸하였다. 그 때 나이 여든이었다. 불전에서는 이 입멸을 반열반 般涅槃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열반, 곧 위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석가모니의 유해는 사라나무 숲에서 성 안으로 운반되어. 성 안을 한바퀴 돈 뒤에 교외에 있는 차이티아라 부르는 성지에서 사촌동생인 아난과 배 다른 동생 난타, 수제자인 마하가섭 등 많은 제자와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유해는 깨끗한 천으로 싸고 그 위를 다시 부드러운 솜으로 쌌으며. 다시 그 위를 깨끗한 천으로 감았는데 이렇게 하기를 오백 번 거듭한 뒤에, 천으로 감싼 유해를 철로 된 기름통에 넣어 뚜껑을 덮고서 그것을 향나무 장작 더미 위에 올려 놓고 화장을 했다고 한다.
인도에서의 화장의 기원은 베다시데, 곧 불교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100년 전후
의 시대로 거슬러올라 간다. 그 전에는 땅속에 매장하는 토장법이 일반적이었지만, 베다시데
이후로는 주로 화장을 해 왔다. 그것은 화장법이 죽음에 대한 부정을 정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인도의 문헌인 「마누법전」은 인간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화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것에 따르면, 바라문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으므로 그 부정을 정화시키는 방법으로 성화聖火를 점화하는 것과 목욕하는 것을 권하였다. 탄생에 의한 부정은 목욕으로써 정화되고, 죽음에 의한 부정은 유해를 화장함으로써 정화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화장은 뼈가 남지 않게 완전히 태웠는데, 그것은 뼈부스러기가 남아 있으면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유해를 화장할 때에도 재가 될 때까지 태웠겠지만, 문헌에서 유골을 채취하였
다고 한 것으로 보아 더 이상 타지 않고 남는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의 유골(사리)은 석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지방의 신자들이 나누어 받기를 원하여 8등분하여 나누었다. 재가신자들에게는 유골은 얻기 어려운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8등분한 유골과 유골을 담아 두었던 항아리와 다비 때 남은 재로써 열 개의 사리탑을 만들었으며, 그 뒤부터 그들 사이에는 사리탑을 숭배하는 신앙이 성행하게 되었다
‘사리舍利’ 란 산스크리트어인 ‘샤리라sariraꡑ의 음을 따서 읽은 것으로, ’신골身骨ꡑ 또는
‘유골ꡑ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의 사리는 곧 유골을 뜻한다. 그러나 그 무렵 화장법에 따라 유해를 재가 될 때까지 태웠을 텐데도 유골을 채취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유골은 그저 범부의 유해에서 채취되는 유골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사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후세에는 사리의 뜻이 조금 변하여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유해를 화장한 뒤에 나오는 작은 구슬 모양으로 된 것만을 ‘사리’라 부르게 되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석가모니의 실존여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당시 영국
의 주재관駐在官이었던 펫페가 1898년에 카필라바스투 근교의 고분에서 ‘석가족이 불타 세
존의 유골을 모셨다’ 는 내용이 새겨진 유골 항아리를 발굴함으로써 석가모니가 실존인물이
었음은 물론 그에 관한 전설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현재 유골 항아리는 인도의 캘커
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속의 유골은 불교 신봉이 돈독한 타이왕조에 모셔져 있다.
그 일부가 일본 나고야시 일태사에도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