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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과 불자들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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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2004년 03월 265호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린다. 정치학 교과서에서만 그럴 뿐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권력을 둘러싼 싸움판이다. 4·15 총선을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의 한국정치는 그냥 싸움판이 아니라 ‘치열하고’ ‘비열한’ 등의 수식어를 갖다붙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극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월 21일자 일간신문을 통해 전달된 정치인들의 말은-엄청난 모략, 치졸한 정치 보복, 싸가지없는 행동, 정면 대응, 몸부림-가히 아귀지옥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이다.
정치에서의 권력투쟁은 당연한 현상이고 일상적인 모습이다. 정치란 권력을 쟁취해서, 그 권력을 행사하는 원리로 작동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게 싸움의 논리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잘 아는 국민들도 요즘의 상황을 보면서는 착잡하다 못해 어처구니 없는 쓴웃음을 지어낸다. 생활의 고달픔과 겹쳐지는 지점에선 분노하고 마침내는 욕설을 뱉어내고야 만다. 청년실업률 8%, 신용불량자가 300만명인데, 어느 가정인들 여기서 자유롭지 않은 현실이다. 그런데 어느 정당에서도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싸우지 않고 있다. 결국 정치를 빙자해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만 벌이고 있는 모습을 국민들은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선거는 치러진다. ‘이번 선거에 불자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런 주제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눌 것이며, 이미 나름대로 선택의 기준을 정하고 지지 정당과 후보를 마음에 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겠다고 밝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읽혀진다.
선택의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불교인이라고 해서 불자 후보 또는 불교의 활동과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공약을 내세운 후보와 정당을 반드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연 학연 등의 요소에 예민한 불자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정당과 후보의 이념적 성향을 선택기준의 중심에 놓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흔히 말하는 도덕성과 전문성을 판단 근거로 삼는 불자들도 있을 것이다. 선택은 개인의 선호에 맡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선거의 결과는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산물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을 통해 행하는 법의 제·개정, 정책 수립 및 변경 등은 개인의 생활은 물론 국가의 장래를 규정한다. 따라서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유권자의 몫이다.
투표가 유권자의 권리 행사라는 측면이 강하다면,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유권자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지금까지 유권자는 권리 행사에만 치중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았다. 시민운동이나 청원, 시위 등을 통해 책임을 지키려는 예가 적지 않았지만, 당선된 국회의원들이나 정당의 행태를 바로잡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젠 후보와 정당의 공약과 정책을 반드시 이행시키겠다는 국민의 힘과 의지를 모아나가지 않는다면, 권리만 행사하고 책임을 외면하는 국민으로 전락한다. 우리 불교는 2002년 대통령선거와 그후의 과정에서 이런 모습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노무현 후보는 북한산 국립공원, 천성산·금정산 관통노선을 백지화하겠다고 공약했다. 당선 이후에도 공약의 이행을 다짐했다. 그러나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선거 당시의 공약은 액면 그대로 믿을 게 못 되는 측면도 있다. 당선을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내놓는 공약도 있을 것이고, 재정의 부족이나 제도의 미비로 애초부터 실현하기 어려운 공약도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 천성산·금정산 관통노선 백지화’는 어느 측면으로 보나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공약 이행의 의지가 없었고, 환경과 생명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노무현 대통령의 철학 빈곤이 빌 공空자 공약이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교계가 공약 이행을 강제할 힘과 의지의 결집이 없었음은 큰 아쉬움이었고, 불교계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선거 전에 표를 모으기 위해 그럴듯한 공약을 하고, 이후에는 지키지 않아도 하등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을 정치인에게 심어주고, 더 나아가 불교인 스스로 불교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우를 범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4·15 총선을 앞두고 불교단체의 움직임은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지난 2월 19일 교계의 13개 단체가 모여 ‘2004 맑은 정치 불교연대’를 발족시켰다. 발족선언문을 통해 불자들의 선택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종교적 편향성을 배격하자는 것이 눈에 띈다.
“종교를 떠난 합리적인 기준에 근거해서 정치인을 분별해야 합니다. 과거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지지하고 밀어줬던 아니면 종교가 다르다 해서 배척했던 아픈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그릇된 행위가 어찌 보면 지금과 같은 부패공화국을 만들어가는 데 일조했다는 반성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불자들이 스스로 종교적 편향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꼼꼼한 판단의 기준과 소신있는 자세로 총선에 임할 것을 거듭 당부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같은 운동을 타종교계와 함께 진행할 것이며 이를 통해 종교계가 ‘맑은 정치’를 선도하고 국민적 귀감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기준으로 후보와 정당을 선택하자고 제안했다. “△도덕적으로 신뢰받는 깨끗한 정치인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화합할 수 있는 정치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중시하는 정치인 △종교, 이념, 정파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미덕을 갖춘 열린 정치인에 대한 기준을 제안하고 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유권자들이 미래지향적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해 선거 이후에도 책임지는 노력이 따를 때 비로소 꽃이 된다. 불자들도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내야 하는 데서 자유롭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