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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각藏經閣에 피는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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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천 - 김홍영 2004년 03월 265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많은 사찰 가운데 법보종찰로서의 위상이 뚜렷하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대장경판은 해인사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 봉안되었고 이곳에 오르는 계단의 경사는 매우 가파르다. 따라서 대적광전을 지나 장경각에 오르는 계단에 첫발을 디디고 위를 바라보면, 이 순간 장경각의 위용이 하늘에 닿을 듯한 느낌이 든다.
일찍이 운오雲塢 조성숙趙性璹(1843~1898)은 해인사를 유람하고 몇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장경각을 두고 지은 한 편의 시가 있다.

쟁영판각접중천 嶸板閣接中天 드높은 장판각 중천에 닿아
세우마풍열기년 洗雨磨風閱幾年 풍우에 견딘 지 몇 년이던가.
백법능전경팔만 百法能傳經八萬 일체의 선한 법 팔만경에 전하고
현담독천계삼천 玄談獨擅界三千 현묘한 말씀 홀로 삼천계에 떨치네.
충금불감서창하 蟲禽不敢棲下 벌레와 새들 감히 창 아래 깃들이지 못하고
초목원무락원전 草木元無落院前 초목은 원래 집 앞에 떨어지는 일 없었네.
영험존사하처재 靈驗尊師何處在 영험한 존사는 어느 곳에 계시는가?
주향층탑기청연 炷香層塔起靑烟 향을 피우는 층탑에 푸른 연기 이네.

중천에 닿을 듯한 장경각의 위용과 함께 대장경판을 보존한 판전에 벌레와 새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초목이 떨어지는 일 없다는 영험한 현상을 노래했다.
그런데 장경각의 신비한 현상이 어디 이뿐이랴, 또한 해마다 두 차례 연꽃을 피우는 일이 있기도 하다. 때는 일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의 오후 3시를 기해서이다. 연꽃은 어디에서 피는가. 그곳은 바로 장경각으로 들어서는 문을 지나 수다라장脩多羅藏이라는 편액이 걸린 첫번째 판전의 둥근 문 안쪽에 비스듬히 햇살이 비치는 공간이다. 춘분과 추분의 오후 3시에 수다라장 편액 위로 내리뻗은 서까래 끝의 기와 막새를 비추는 햇살이 문 안쪽의 공간에 둥근 연꽃 모양의 그림자를 이루어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것이다. 삼천계에 떨칠 팔만대장경을 보존하는 장경각에 한 떨기 청정한 보련寶蓮의 개화開花를 이루어낸 장인匠人의 뜻에 탄성歎聲을 발할 따름이다.
이 달은 마침 춘분이 든 달이다. 이즈음 기후도 온화할 터이니 몇몇 벗들과 함께 해인사를 찾아 신비한 개화를 지켜보고자 한다.□

*필자 주 : 본문에 인용한 시는 조성숙의 시문집인 《운오집》 권1에 <장판각藏板閣>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김홍영 님은 한학자로 대구의 문우관文友觀에서 한문 강의 및 번역에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