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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이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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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혜해/경주 흥륜사 선원장 2004년 03월 265호
무슨 일인지 어려서부터 금강산엘 가고 싶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어렸던 시절, 고향 신의주 근처 집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를 보면, 사람이 늙어 다 죽고 나서 저 산과 바다만 남아 있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이불을 쓰고 울었다. 그런데 그렇게 슬프다가도 금강산 생각을 하면 그만 마음이 환해지곤 했으니, 분명 전생에 금강산과의 숙연이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탁발승만 나타나면 ‘따라가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육십여 년 전인 당시만 해도 스님네들을 얼마나 하대했던지, 그런 모습에 그만 만정이 떨어져 그러지도 못했다. 그런데다가, 여자인 내가 출가를 하면 남동생이 안 좋다고 해서 엄두를 못 내고, 언젠가 죽을 때는 금강산에 가 죽으리라 그렇게만 생각했다. 열아홉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내가 가장이 되어 남동생을 데리고 농사를 짓다가 스물넷 되던 해, 남동생을 혼인시켜놓은 다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늘 귀동냥으로 듣던 사명 대사에 대한 동경이 출가를 하게 했을 것이다. 절에 가 공부를 해서 사명 대사처럼 신통자재한 힘을 얻어 나라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하에 태어났던 내게, 성장하면서 느낀 그들의 압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남자들은 열일고여덟만 되면 군대로 끌려갔고 조금 더 나이 먹은 이들은 보급대로, 징용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농사를 지어 놓으면 군량미로 다 가져갔고 길쌈해 놓은 것과 누에쳐 놓은 것, 목화농사 지은 것까지 모두 공출해 갔으니, 밥한 그릇 제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곤고한 나날이었던 것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엇인가 가져가려고 나타나는 그들의 눈을 피해 방아를 찧느라 가슴 졸였던 세월을 살면서, 도 통해서 일본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구하리란 생각을 늘 가슴에 품었던 게 출가를 하게 한 셈이었다.
실제로 출가해서 나는 언제나, 부처님 전에 나아가면, ‘부처님, 우리 나라를 자주독립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음력 칠월 초하룻날 금강산 신계사에 딸린 법기암으로 출가를 했는데, 다음해 칠월 칠석날 유점사에 있다가 광복을 맞았으니, 꼭 일 년 만에 소원을 이룬 셈이다. 칠월 칠석날 대중들이 모여 절 주변의 풀을 베고 있는데, 한 스님이 지나가면서 ‘해방이 되니 좋긴 좋네’ 하길래, 해방이 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풀을 다 베어서 해방이 되었다고 하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에 대중들이 다 모였을 때, 실제로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음을 알고 얼마나 좋았는지, 성불하면 그렇게 기쁠는지 몰라도 내 평생 그렇게 즐거운 순간은 없었다. 해방이 되어서야, ‘내가 중이 되었으니 참말로 불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구나’ 하는 발심을 다시 했으니, 해방은 내게 수행자로 거듭나게 했던 잊지 못할 역사요 사건이었다.
여름에 법기암으로 가서 행자시절을 보내다가 섣달 어느 날 계를 받았으니, 여섯 달쯤 행자생활을 했다. 당시 법기암엔 나의 은사스님이 된 대원 스님과 사숙님, 사형들을 비롯해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 등 이십 여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곳이었다.
엄격하기만 하고 무서운 은사스님 앞에서는 고개 한번 들지 못했다. 그래서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밥하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하며 지냈다. 때로는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져나르기도 했다. 밥만 먹고 나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 우리가 부역하던 다른 한쪽에선 칠팔십 명의 우리 젊은이들이 사흘 동안 훈련을 받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에 끌려나가곤 했는데, 젊은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출가해 처음 맞은 겨울, 이월 초엿새날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땐 지금보다 겨울이 훨씬 추웠다. 게다가 그해 겨울에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눈을 치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눈을 그대로 놔두면 마당이 질퍽거려 모두 퍼다가 버려야 했는데, 초엿새이던 그날 마당가에 남아 있던 언 눈을 모두 두드려 깨서 치워버리고 빨래를 시작했다. 스무 명의 식구들이 벗어놓은 태산같은 빨래를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어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 하나를 걸어놓고 삶고 또 삶아내었고, 삶은 빨래를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이고 숯물도 들였다. 그렇게 일이 많은 와중에도 나의 은사스님은 아이들 옷을 만들기 위해 무명에 분홍, 빨강 등 색색의 물을 들여 밤새도록 다듬이질을 해서 재봉틀에 박아 아이들의 옷을 지어 입혔다. 겨울 빨래를 하던 그 이월 초엿새날, 내 옆으로 다가와, ‘빨래 이렇게 많은 것 처음 보지?’ 했던 은사스님은 당시 예순의 나이였는데,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숙명여고를 나와 가사선생을 했던 인텔리였다. 내가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모두 피신을 시키고 당신은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가더란 얘기를 조카상좌에게 들었다. 늘 관음기도를 했고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던 신심 깊은 분이었다.
계를 받고 다음 해 5월, 내가 동생이 군대에 끌려가면 따라갈 요량으로 집에 가던 길에 잠깐 들른 유점사에서 일 좀 돕고 가라고 하는 바람에 붙들려 있으면서,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입던 가사장삼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은사스님께서 매우 분노했다고 한다.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는 은사스님의 역정에,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 줍시다’ 하는 사형의 말에 노여움을 풀고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었다. 다시 돌아갈 생각으로 나온 길이었으나 그후 유점사에서 해방을 맞았고, 공산당 치하에서 수행을 할 수가 없어 이남으로 넘어 오느라 잠깐 다니러 나온 그 길이 은사스님과는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남에 와서 들으니, 육이오가 날 때까지는 잘 계셨다고 하는데, 육이오 때 법기암이 불타버렸다고 하니 산불에도 목숨 걸고 지켰던 법기암을 떠나 어디에 계시다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자 단걸음에 세 번이나 다녀왔는데, 법기암엔 가보지도 못하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탑만 덩그러니 있던 신계사 터에서 망연자실 서 있다가 돌아왔다. 우리 법기암 문중에 ‘언젠가 법기암을 다시 지으라’고 일러 놓았으니 그런 시절인연이 오리라 믿는다.

올해 내 나이 여든넷, 그리도 그리던 금강산으로 출가해 어느덧 육십여 년이 흘렀다. 그 하많은 세월, 경산 스님과 보봉 스님을 따라 이남으로 내려와서 화두를 배우고, 향곡 스님, 효봉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뵈면서 환희로움도 많았던 세월이었다. 육이오 전,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 법문을 듣고 무언가 다 떨어져나가는 듯한 시원함과 수행자로서의 긍지를 느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평생 화두 공부하면서 선방에 살았으되 아직 공부가 부족해 성불을 하지 못했으니, 부처님께 부끄럽고 나 자신과 후학들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아마도 승려노릇 해본 사람은 세세생생 승려노릇 하고 싶지 다른 데 머리를 돌리진 않을 것이다. 금방석에 앉혀 준다고 한들, 임금 자리를 준다고 한들 마음 밝혀 성불에 이르는 이 수행자의 길만 하랴. 화두공부라는 것이 성불할 때까진 ‘초고추장에 고드름 찍어먹듯’ 아무런 맛이 없는 공부이기는 하나, 언제 해도 내가 해야 할 이 공부를 다음 생에도 놓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