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봄이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우리 삶은 하루하루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요즘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겨울의 매서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겨울에 있었던 내외적인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유가 커서일까. 예년과다르게 기다림에 목이 길어진다. 우리 나라 국민들이 모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기다리는 건강한 정치며, 원자재 가격은 치솟고 더불어 물가는 올라만 가고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은 한국 실물경제의 현실이 겨울을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생각해본다.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아니면 먼 미래에 실현하고 싶은 꿈이든 치열하게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를 말이다. 부처님 제자로 사는 수행자들은 부처를 이루는 그 날을, 금생이 아니면 내생이라도 그때도 못 이룬다면 세세생생에라도 이루리라 정진하며 기다리겠지만 지극히 하루하루 기다리는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다. 오늘보다 더 나은 그 어떤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에는 기대와 설렘, 초조와 불안이 함께 한다. 기다림은 미래가 있고 가능성이 있다.
일찍이 유년시절에는 유난히 가슴에서 일렁이는 설렘이 많았던 것 같다.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설을 기다릴 때도 그랬고, 봄 소풍 날짜가 정해지면 손가락 꼽던 여러 날이 그랬다.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를 기다릴 때도 산모퉁이 바라보며 그랬고, 동네에서 빨간 책가방과 예쁜 고무신을 제일 먼저 사다주신 아버지가 먼 출장에서 돌아오길 기다릴 때도 그랬다. 어린 시절 기다림은 크지도 않고 순박했고 희망만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세월에 더께가 쌓이면서 기다림에 설렘과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라 기다림의 고통을 알게 되고 희망찬 기대보다 불안과 초조, 절망이라는 단어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는 불자님은 남편을 멀리 외국 지사에 보내고 아이 둘과 함께 떨어져 있는 남편의 건강과 안전을 빌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지냈다. 유난히 부부금슬이 좋았던 그 부부에게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힘든 시간이었지만 몇 년만 그렇게 기다리고 잘 견디면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기다림이 곧 희망이고 꿈이었다. 이제 몇 개월 후면 남편은 외국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오히려 지난 몇 년보다 그 몇 개월이 더 길다고 하면서 전화도 잦았고 가족들께 줄 선물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여느 때처럼 중학교 영어교사였던 그 불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직은 유치원 다니는 아들을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학교를 향했다. 일교시가 끝나고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단다. 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빨리 전화를 해 보라는 친정어머니의 말에 무슨 일인가 전화를 했다. 오히려 남편의 귀국이 빨라진 것인가 생각하고 기대를 가지고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어제 일요일 휴양지로 나들이 갔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 바로 그 자리에서 실신한 그 불자는 동료 교사들의 보살핌으로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정신을 차린 후 몸을 추스르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억장 무너지는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었겠는가. 늙은 노부모님이 계시고 아직은 눈이 까만 두 아들이 있었기에 자기 목숨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그 불자는 남편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몇 년이 지나도 문득 귀국한다는 전화가 올 것 같아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게 된다고 흐르는 눈물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불자에게는 기다림이 그렇게 아픔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아픔만이었겠는가. 절망이고 고통이고 삶의 포기였을 것이다. 아빠를 꼭 빼닮은 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을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을 아프게 살아가겠지만 흐르는 세월은 그 깊은 상처를 치료하는 좋은 약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상처에 새 살이 차오르듯이 다른 기다림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가지 않을까.
요즘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출가한 아들과 딸을 기다리며 목을 늘였던 부모님의 기다림 말이다. 어느 도반의 아버지.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어엿한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부모님을 다시 찾을 때까지 자기를 찾지 말아 달라는 짧은 글만 남기고 깊은 산속으로 떠나버린 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그 기다림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내 유명을 달리하신 그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싶어 새삼 가슴이 먹먹했다. 어린 딸의 꼬막손을 기억하고 뽀송뽀송한 아이의 볼에 번지던 해맑은 웃음을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슴에는 모습을 달리한 딸의 모습은 없었고 짧은 단발머리에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딸의 모습이 전부였던 아버지다. 그 아버지의 기다림은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었다. 간절한 기다림만 품고 떠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장남처럼 든든하게 믿었던 큰 딸이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떠나고 한겨울 내내 기다림의 눈물을 흘렸던 어머니는 기다림이 가슴앓이가 되고 눈병이 되었다. 그렇지만 평범한 시골 농부의 아내였던 그 어머니는 매일 새벽 시방에 계신 부처님 전에 정한수 올리고 부처님 제자가 된 딸의 건강과 평안을 기도하며 딸이 부모님 곁을 떠나면서까지 따르고자 했던 부처님이 누구인가 공부하면서 기다림을 불심으로 채워가기도 했던 어머니. 이렇게 기다림은 아픔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부모님들의 가슴 아픈 기다림이 헛되지 않기 위해 우리 수행자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은 반듯하고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자주는 못하겠지만 일년에 한두 번 정도라도 이런 부모님의 안부를 여쭈는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동산 양개 화상의 사친서만큼은 감동적이지 못할지라도 한 줄 한 줄 부모님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글을 쓰다보면 인연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부처님 제자로서 수행의 시간을 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을 것이다. 금생에 맺은 부모 자식의 인연이 좋은 선지식의 인연으로 회향되도록 말이다.
그렇게 쓰여진 편지는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마음을 전하는 편지는 우편배달부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편지지에 담는 내용이 사랑과 우정, 그리고 함께 기뻐할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라면 그 편지를 받을 대상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글을 써 내려 갈 것이고, 봉투에 담아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담길 때까지 가슴에 사랑을 고이게 하는 과정이 있었다. 만약에 편지로 전할 내용이 서로에게 마음 편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그 글을 읽을 사람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을까 살피고 또 살피며 쓰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꼭 편지라는 매개물을 통해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지만 거의 개인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이동전화까지 보편화되고 인터넷 문화가 생활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면서 기다리고 생각하는 시간의 여유를 잃게 되었다. 좋고 나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생각을 거듭하면서 마음을 정화하던 시간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의 변화는 단순히 물질에 국한되지 않고 사람의 마음까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게 만들어 놓았다. 사람마다 자라는 환경과 타고난 성품에 개인차가 있지만 성장기에 기다리는 시간을 인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은 사람이나 일 관계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메워지지 않는 틈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마음에 생각을 품었다가 성능 좋은 마음의 체로 거르고 또 걸러서 꼭 필요하고 해야 할 말만을 글로 옮기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입을 통해 쏟아 놓거나 행동하고 메일에 담아 간단하게 키 하나만 누르면 상대방의 메일 박스에 가서 담겨 버린다. 메일이 전해지는 과정은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생활 저변에 이렇게 빨라지고 있는 문화가 간편하고 편리해서 긍정적인 면이 많은 반면 기다리고 인내하는 시간에 만들어지는 삶의 깊은 향기는 잃게 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 삶은 이렇게 어느 한 가지를 얻으면 또 어느 한 쪽은 비워야만 하는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올 봄에는 기다림과 인내가 희망의 꽃으로 피어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