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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양진암 법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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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법해스님 2004년 03월 265호

산문에 들어 삭발 염의하고 나면 처음 접하게 되는 책자 《초발심자경문》은 부피로 따지면 보잘것이 없으나, 그것을 읽고서 초발심을 일으키어 수행자로서의 한살이를 지탱해 가는 초석으로 삼는 이가 적지 않다. 그이도 그러했다. 나는 마음 공부하는 일에 평생을 걸리라. 그 마음은 《선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굳어졌으나 선방으로 떠나기 직전까지도 선뜻 화두를 탈 분이 짚어지지 않았다. 그런 채로 간월암에다 사흘 기도를 부쳤다. 그 먼 길 떠나기 전에, 그저 떠오르는 달이 바닷물에 얼굴 씻듯이 업장을 참회하고, 달빛이 바다 위로 번듯하게 내는 길처럼 공부에 장애 없기를 빌어 볼 참이었다.
간월암으로 떠나기 전날에 들른 해인사 약수암, 그곳에 처소를 두고 있는 도반 하나가 그이를 백련암으로 이끌었다. 그이의 말을 들은 성철 스님이 소리쳤다. “내한테 외상 화두를 달라는 말이가! 오늘 밤에 당장 삼천 배 해라!” 어마지두에 저녁 예불과 함께 시작한 절은 새벽 두 시가 되어서 끝났다. 성철 스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들어, 절이 끝났으니 곧장 가 뵈어야 했다. 그 길로 도반과 함께 백련암으로 향했다. 그러나 들고 있던 손전지가 까무룩하고 불이 나가 버리고, 울창한 숲은 달도 별도 가리어 옆에 선 길동무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도반이 이르는 대로, 물소리가 나는 쪽을 멀리하고 산비알쪽으로 붙어 기었다. 밝으면 십오 분이면 갈 길이었다.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리는 첩첩산중, 두 시간쯤 땀을 흘리며 더듬어 간 길 끝에서 백련암 불빛이 떠올랐다. 호랭이 같은 스님이 껄껄 웃으셨다. “호랭이가 안 물어 갔더나?” 그리고 화두 하나 탔다.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탄 데서 공부를 해야 의심 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물어 해결할 수 있겠구나. 세속 나이 24살 되던 해에 법주사 수정암으로 출가, 동학사를 거쳐 운문사 강원을 졸업한 법해 스님은 해인사와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84년부터 삼선암과 약수암 두 곳에서 삼 년 결사를 거푸 했다. 성철, 혜암, 법전, 일타 스님 등 산중은 울창한 법림法林이었으니, ‘애쓰지 않아도 곧게 자랄 만’한 곳이었다. 삼십대 겁 없던 나이, 장좌 불와, 오후 불식, 가행 정진, 묵언, 날마다 삼백 배 예불 대참회, 그리고 간간이 큰스님들 찾아뵙고 구한 활구活句들로 저를 채찍질했다. 세 시간 이상은 안 된다는 큰스님 말씀대로, 잠은 세 시간을 넘게 자본 적이 없었다. 밤 열시에 방선 죽비가 울려도, 무릎 덮개를 들고 나와 도량을 돌며 열두시, 새로 한시를 넘기며 화두를 챙기곤 했었다.
생사가 다급한데 내일이 어디 있나. 요만큼 걸으면 어느새 끊어져 있던 화두가 내일은 조금 더 늘어나고, 그 다음에는 도량을 왕복할 만큼 되었다. 베개 베고 누워도 딱하니 챙기어 두면, 잠 깨는 대로 바로 화두가 들리곤 했었다. 문밖으로 일 주일을 비바람이 쳐도 일없이 고요해야 ‘삼매’라 할 수 있을 터였다. 그에는 못 미쳐도, 그저 화두와 하나가 되는 ‘일념’은 되었던 듯했다고 한다. 평생을 고만큼만 자고, 내내 오후 불식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인생이니 올해로 세속 나이 쉰다섯, 그가 지금 머무는 곳은 동화사 양진암 선방의 상주常住 입승 소임과, 동화사가 중심 도량인 기본선원의 선감 소임을 맡고 있다. 죽비를 잡은 그이의 경책은 엄하기로 호가 나 있다. 승속을 막론하고 자애로운 어른은 있을지언정 엄한 어른은 드물어진 이즈음, 그이가 자처하고 있는 ‘잔소리꾼’은 그래서 도드라져 보인다 할 만한 것이다. 더구나 수행자로서의 기본 바탕을 닦게 되는 기간을 책임 맡은 소임자임에랴. 아니, 그것은 그이가 몸소 겪은 뒤로 지금껏 남은 아쉬움, 또는 아직까지 그를 반이나마 좌복 위에서 버티게 하는 힘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옥에 가더라도 화두를 들라는 어른 스님의 말씀은 그것으로 인因을 삼을 뿐, 깨칠 무엇이 있다는 생각조차 지워야 한다고는 한다. 한 생에 안 될 일이라고도 한다. 삼 년 결사만 끝내면 도를 깨칠 것만 같았던 때, 그러나 결사를 끝내면서 그이는 울었다. 그뿐인가. 두 번째 결사를 해마치고, 미타사, 견성암, 수정암, 그리고 대원사를 거쳐 1998년부터 이곳 양진암에서 머물게 되기까지, 스무 해 동안 독살이 한 번 해본 적 없이 대중 선방을 지켜 온 그이는 지금, ‘펴보일 것이 없다’고 한다.

1997년에 문을 연 ‘기본선원’은 경전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승가대(강원)에 견주어, 참선의 실제 수련에 비중을 두고 있는 조계종 상설 기본교육 기관이다. 선원 입방날에, ‘간화선을 종지로 삼고 있는 조계종의 앞날이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는 선원장 스님의 격려 말씀은, 기본선원에 거는 종단의 기대를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 기대치만큼 이곳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 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우선 입방하기부터 쉽지 않다. 여섯 가지 정도의 질문에 답하게 하는 갈마 과정에서는 지원자의 참선에 대한 입지가 얼마나 투철한지, 그리고 교리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심사하게 되는데, 지난해 사미니의 경우, 10명의 지원자 가운데 6명만 입방이 허가되었다. 재수, 삼수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즈음의 경향이 그러하거니와, 유학을 포함한 대졸 이상의 학력자가 셋 중 둘쯤 된다. 출가 이전에 이미 참선 경력이 있는 사람이거나, 강원 과정을 이수한 사람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도 높은 편이다.
교육 기간은 4년이나, 강원처럼 연속식 집단 수업 체제가 아니라, 일 년에 두 번, 산철인 봄가을에 동화사에서 습의(6안거)와 교과 안거(3년, 6안거)를 이수하게 한다. 또한 8번의 본철(동, 하안거)을 나게 하되, 백담사와 봉암사 등의 선원에서 결제를 하는 사미와는 달리, 사미니는 각자 제방 선원에서 실참을 하게 된다. 교과 안거 중에는 부처님 일대기를 비롯, 《금강경》, 《육조단경》, 《참선경어》, 《서장》, 《어록》, 《기신론》, 《선요》, 《선관책진》, 《돈오입도요문론》 그리고 선종사 따위를 배우되, 무여, 혜국, 고우, 원융 스님 등, 초빙되는 교선사(강사)의 면면으로도 짐작되듯이, 수업은 선으로 회통시키는 내용이 된다. 그런 점에서 기본선원의 학인뿐 아니라, 난자 익히기에 급급했던 강원 시절을 보낸 그에게도 귀한 시간이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사미 95명과 사미니 33명이 배출되었다.
큰절을 처소로 삼고 있는 사미들과는 달리, 산내의 부도암과 양진암 두 곳을 처소로 삼고 있는 사미니들은 두 시간씩 진행되는 수업을 받기 위해 걸어서 삼십 분쯤 걸리는 큰절까지 하루에 두 번씩 오르내린다. 3시에 일어나서 6시에 아침 공양을 하기 전까지 한 시간 반 입선, 8시에 시작되는 수업을 받으려면 7시 20분에는 양진암을 떠나야 한다. 가사 장삼 갖춰 입고 차수로 안행, 오후에 또 수업, 저녁 공양 뒤에는 습의를 익히고, 다시 10시까지 입선에 든다. 하루 네 시간 반쯤 되는 참선 공부, 일정은 고단하여 때로는 학인들을 한 시간 앞당기어 자리에 들게 해야 다음 날 수업에 지장이 없을 만큼이 된다.
지난 겨울 양진암에는 스무 명 남짓 구참 수좌들이 방부를 들였다. 양진암 가풍, 석 달 중 한 달을 가행 정진을 한다. 면벽 아닌 대좌 치기로 앉아 서로를 경책하고, 잠을 부르는 무릎 덮개는 되도록 삼가게 한다. 어간에 앉은 상판 스님들이라도 조는 모습 보이면, 결제철 한 달 가행 정진 때에조차 사정 두는 법 없이 죽비를 들고 마는 그이다. 그것이 선방의 입승 소임자가 맡은 일인 것이다. 수좌가 어찌 죽비 소리에 놀아날 것인가. 공양 후에는 양치만 하고 바로 좌복 위에 앉을 일이었다. 방선 중일 때에는 선방은 물론이고, 상중하 각방에서도 묵언을 해야 한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선방 위 물탱크 뒤로 돌아가서 해라.
하물며 수련 중인 학인임에랴. 기본선원 사미니들의 평균 연령은 이미 삼십대 중반을 넘어섰다. 행자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곳에서 단기간에 피교육자가 겪어 내야 하는 수련 과정은 세 철을 지내기까지 혹독하기 짝이 없다. 따로 시간 내어 받게 하는 습의 교육 말고도, 가사 바로 입는 일에서부터 앉음새, 좌복 펴기, 문 여닫기, 또한 선감 스님과 함께, 양진암 입승인 그의 가르침은 한 달 내내 24시간 이어지는 것이다. 아침과 사시, 하루 두 번 발우 펴기 원칙을 고수하는 일이 어찌 하찮은 일이랴. 작지만 큰일, 그것은 선방의 기강을 유지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비구니 수좌들을 외호하는 소임과, 제방 선원의 입승 소임을 맡고 있는 수좌들의 모임인 선문회의 총무를 맡고 있는 그이는 모임이 있을 때면 기본선원 사미니들의 입방을 부탁하곤 한다. 선원에서는 사미니는 커녕, 일정 회수 이상의 안거를 해마친 사람이 아니면 입방을 꺼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인들에게는 따로 당부한다. “공양주, 그도 아니면 채공 소임을 자청하고서라도 방부를 들여라.” 사미니 때일수록 되도록이면 큰 선방에서 살아야 ‘법다운 생활’의 규범을 익히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힘이 있을 때에 힘을 얻어야 한다. 그가 겪은 바, 자신이 어느 때쯤에 이르러 몸이 예 같지 않아지고, 주지 소임은 아니더라도 선방에서 죽비를 잡는 소임도 저를 곤하게 했던지 공부 형편이 여의치 않아졌다. 나름대로 애써도 도시 진眞의심이 안 들어 어느 날에 큰스님 한 분을 찾아뵈었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니 자문해 보아라. 정진이 지난날과 여일했더냐.”
‘장군 죽비,’ 또는 ‘수좌사관학교’의 ‘사감’ 노릇을 자청했다 하나, 그저 대중이나 학인들을 다그치고 고삐를 조여주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에는 유난히 많은 노스님들이 원적에 드셨다. 쓸쓸하고도 아쉽다. 이제 그 자리는 후학들이 메꾸어 가야 할 바, ‘쥐고 있는 것 없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두는 다그침일 뿐이다. 옆구리를 바닥에 붙여 본 바 없이 정진하다가, 일흔 나이에 도를 깨치었다는 협脇 존자도 있지 않았더냐. 끈기로 밀어 붙여라. 몸이 시키는 말을 지나치게 잘 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니냐. 사량 분별 떨치고, 개인주의도 떨쳐 내라. 혹시 너희가 너무 풍부한 물질에 익숙해져 버리지는 않았느냐. 그리고 덜 외로우려 들지는 않느냐.
혜암 스님이 어느 날 애를 쓰던 그에게 주신 게송 하나가 있다. “심마心馬가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달아나거든 / 잡아오고 잡아오고 또 잡아오라. / 이와 같은 날이 오래 깊어지면 / 잡아오지 않아도 스스로 눈앞에 있게 되나니 / 비로소 이 같은 경계에 이르러서야 / 몰록 본자성임을 깨닫게 되리. / 누가 만약 마음 있는 곳을 묻거든 / 달은 천심天心에 이르렀고 밤은 삼경이라 하리라.” 도를 이루는 길에 선후배가 유별하겠는가. 그이가 도반 삼는 후배들에게도 보여서 마음에 새기게 하는 게송이다.
선방 앞, 그가 처소로 삼고 있는 정묵당 툇마루에 늦겨울 햇빛이 비끼었다. 공양 후에 그와 함께 가파른 길 올라오신 성련 노스님이 잠깐 쉬었다 가신 자리, 팔공산 병풍 바위의 삼엄 기상이 곧장 내리꽂히는 곳이다. 유서 깊은 공부 도량, 오늘의 양진암이 있게 하신 분, 올로써 여든다섯 되시는 노스님은 아직 정정하시다. 그 훈기 때문일까. 묵은 참나무 가지에 둥지를 튼 겨우살이의 연두빛이 아니더라도, 호젓이 낡아서 정겨운 정묵당 처마 끝에 달린 것은 분명한 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