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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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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정인지/해인사 천도재 사무실 2004년 03월 265호
한번쯤 이런 경험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리듬에서 벗어난 뭔가 색다른 일을 생각하다가 희뿌연 아침을 맞은 경험이랄까?
약 6개월 전, 그랬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친 나머지 퉁퉁 부은 얼굴로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생각 끝에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마치 출가라도 하듯 필요 이상의 비장함으로 머리 속을 꽉 채웠다. 검은 배낭 하나 단단히 메고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 뒤로, “웬만하면…… 집으로 내려온나이~!” 하시는 엄마의 마지막 당부가 알 수 없는 설움으로 순간 눈앞을 흐리게 하였다. 누가 떠밀어 떠나는 길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내 발걸음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반나절이 지났을까, 해인사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집을 떠날 때 내리던 굵은 비는 다행히 우산을 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늘어졌지만, 여름날 특유의 비가 갠 뒤에 잇달아 찾아온 후텁지근함은 나를 힘들게 하였다. 게다가 당초에 ‘버리고 비워야지’하는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고, 여정에서 오는 피로로 인해 다리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이 무렵,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다름 아닌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와 적당한 간격을 이루면서 멋스럽게 구부러진 낯선 나무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일상에서 벗어난 작은 존재가 느끼는 어설픈 불안함을 위로하는 듯 했다.
해인사의 한 모퉁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가을, 겨울을 지나 어느새 봄을 맞게 된 지금, 그때 나무가 주었던 잠깐의 위로를 떠올려 보았다. 요즘처럼 봄기운이 돈다 싶으면 개인적으로는 가장 먼저 식물에 관심이 집중된다. 겨우내 찬 기운을 버티느라 메말라 버린 잎을 정리하고, 볕 좋은 장소로 하나씩 화분을 옮겨 놓을 일을 염두에 둔다. 해인사에 머무르는 동안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화초에 대한 관심을 자제하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가깝게 느껴지는 봄기운 탓에 집에 두고 온 화초들 생각이 간절하다. 특히 6년이 넘은 동고동락으로 화초라기보다 나무가 되어 버린 로즈마리들. 그래서인지 이들은 부드럽고 포근함을 주는 향기와는 다르게 외관상으론 거칠면서도 잔잔한 노년을 연상케 한다. 또한 자기에 대한 관심을 왕성한 번식력으로 보답하는 꽃 베고니아는 풍성함을 자랑하며 항상 밝은 기운을 전한다.
이들을 두고 오면서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했건만, 춘란을 포함한 몇 개의 화초들이 얼어서 녹아버렸다는 소식을 확인하였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일부러 무심했던 마음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막상 춘란이 있던 화분을 내려다보니 원망과 안타까움이 일어났다. 이는 마당에 줄지어 선 화분들 틈에서 유난히 춘란 앞에 쭈그리고 앉으셔서 조심스레 물 뿌리고 손질하시던, 예전 아버지의 모습이 이것을 볼 때마다 거기 그대로 따뜻하게 머물러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반응에 이해의 차이는 있겠으나, 화초에 관심을 가지는 한 사람으로 어떤 시인의 한시집漢詩集에서 본 구절의 진심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하였다.

종화수미발種花愁未發
화발우수락花發又愁落
개락총수인開落總愁人
미식종화락未識種花樂
꽃을 심을 때에는 피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꽃이 피면 또 지는 것을 근심하네.
피고 지는 것 모두 사람을
시름겹게 하니,
꽃 심는 즐거움을
아직 알지 못하겠구나.
- 이규보 作 -

원하는 모든 것들의 모습이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이미지는 쉽게 변하지 않기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또한 다른 형상에서 재현될 것을 항상 기대한다.
추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빈 화분으로 변해버린 소중한 기억을 담은 춘란을 봄기운이 더해 오면 종화수미발種花愁未發, 화발우수락花發又愁落의 마음으로 다시금 심고 싶다. 설사 겨울추위에 얼어서 또 녹아버린다 할지라도 이를 마주하는 매순간마다 떠오를 옛 이미지가 언제나 그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