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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님을 어디 가서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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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덕민 / 전 쌍계사·범어사 강주 2004년 02월 264호
범어사로 출가해서 동산 노스님 상좌가 되어 노스님 시봉을 했던 먼 외삼촌뻘 되는 스님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 그분이 우리 집에 들르면, 동네 사람들을 앉혀놓고 참선이야기며 무자無字 화두 얘기를 하곤했다. 어려서부터 또래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노인들과 같이 지낸 애늙은이였던 나는, 일종의 정신통일로 들렸던 그러한 참선이야기와 절이야기를 들으면 그리도 신기하게 여겨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미 5학년 때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연습했다. 때로는 귀가길에 화두를 든 채 몇 십릿길을 집 반대 방향으로 가버린 적도 있을 만큼 빠져들기도 했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서재에서 한문을 익혀 조숙했던지, 세상살이가 흡족하지 않았고, 급기야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5학년 때, 외삼촌 스님을 따라 고흥 능가사로 가버렸다. 비자나무로 꽉 차 있던 팔영산 자락의 능가사에 갔더니 노스님 한 분이 계셨다. 그분과 같이 죽은 소나무 가지를 똑-똑 끊어 밥을 짓는데, 왜 그런 것들이 그렇게 익어보였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게 스치던 노스님의 장삼자락이 천상의 옷깃이 스치는 듯 했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그때 들었던 솔밭사이의 바람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렇게 한 주 동안을 집도 학교도 잊어버린 채 있었더니 집에서 수소문해서 찾아와 끌려가버렸는데, 그날 밤, 먼길을 오느라 피곤하여 설핏 잠이 들어 있을 때, 내가 잠든 줄 알고, 아버지가 ‘저놈은 절에 갈 놈이니까 산하고 논은 동생에게 주어야겠다’는 소리를 했다. 절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소릴 들으니, 왜 그리 서럽던지, 아마도 아버지의 그 말이 출가를 앞당기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다음 날 오후에 나는 절에 간다고 떼를 썼고, 부모님의 꾸중을 뒤로 하고 아주 집을 나와버렸다. 보성의 너른 차밭에서 태어난 내가 그렇게 본격적인 출가의 길을 나선 게 지금부터 마흔일곱 해 전, 열세 살 때였다.
외삼촌에게 들은 대로 보성에서 차를 타고 대전으로 해서 밤열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다리가 퉁퉁 붓도록 범어사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그 길을 일러주고 나를 출가하게 만들었던 외삼촌은 그후 속가로 돌아갔으니 아마도 나를 인도해주려고 왔던 인로왕보살이 아니었나 싶다.
아마도 나는 전생부터 승려로 살아왔을 것이다. 범어사에 가니 동산 노스님, 경산 노스님, 그리고 우리 노스님인 고봉 스님 등 삼사십 명 되는 스님들이 계셨는데, 모두 신선처럼 다가왔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단박 수그러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노스님들이 계시는 범어사는 이 세상이 아닌 듯 하였다. 마치 황금으로 깔아놓은 황금지 같았고, 어린나이에도 굶어도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동산 노스님을 시봉하던 선방의 노보살님이 ‘집이 어디냐’ 물으면서 귀여워하더니, 이미 그곳에 와 있던 스무 명이나 되는 다른 행자들에겐 양복을 입혔으나 내겐 ‘중노릇 할 놈이라’고 하며 떨어진 가사를 입혀주었다. 그런데 왜 그리 그 옷이 편하고 좋은지, 당시 가난했던 범어사에서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밥을 해주었으므로 바쁘기만 했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신이 나서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행자시절을 열었다.
다음 날 행자실에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긴 지금도 그분 앞에 서면 무섭기만 한 나의 스승, 우리 스님을 만나뵈었다. 행자들을 통솔하며 《천수경》 《반야심경》 《초발심자경문》 등의 공부를 시키던 행자반장이었던, 다 떨어진 누더기옷을 입은 스님을 뵙는 순간, 나는 ‘죽은 원효 스님의 화신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스님의 세수 스물아홉이었는데, 어찌나 맑고 깨끗하던지 그 빛나는 모습을 뵙는 순간 나의 스님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지금 울산에 계신 우룡 스님이 그분이다. 당시 우리 스님은 중강仲講이 아니면서도 사미승들에게 《서장》을 가르쳤는데, 내가 살며시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면 어찌도 그렇게 정성스럽고도 똑똑 떨어지게 글을 잘 가르치던지 그러한 모습은 내게 흠모의 정을 더하게 했다.
내가 가서 인사를 드리니 스님은 《초발심자경문》을 새겨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처음 보는 경전이었으나, 내가 정확하게 새기니까, ‘언제 절에서 익혔느냐?’ 하고 물었는데, 어려서부터 속가에서 한문을 익혔던 나는 여러 행자들 중 단연 돋보였다. 《초발심자경문》과 《반야심경》을 단박에 다 외우고, 대예참大禮懺을 뜻도 모른 채 다 외워버렸으니, 행자시절을 얼마나 신명나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두어 달쯤 흐른 어느 날, 원주스님이 나를 지목하면서 ‘저놈을 지리산 연곡사 서굴암西窟庵에 요양하고 계신 지효 스님 시봉으로 보내야 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정화 때 할복을 해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지효 스님이 행자 하나를 보내달라고 했던 차에, 제일 나이 어렸으나 심부름 잘하며 민첩하고 똘망했던 나를 점찍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스님이 ‘나이 많은 애들도 있는데, 왜 하필 저 애를 보내려고 하느냐, 저 어린애가 그 꼴짜기에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반대를 했지만, 우리 스님은 큰 영향력이 없어 보였다. 지효 스님의 맏상좌인 원주스님에게 찍혔으니 꼼짝없이 차출될 상황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우리 스님이 어느날 걸망 하나 달랑 짊어지고, ‘나는 만공 스님이 계신 정혜사 선방에 간다. 2년쯤 있다가 언제 한번 만나자’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우리 노스님이 수덕사 정혜사 선방 입승을 보고 계셨는데, 은사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따라 붙어야 되는데…’ 하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스님을 놓쳐버렸다. 그런데 그 어린나이에도 우리 스님이 걸망을 지고 범어사 청풍당 대밭을 사라질 때의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혀 너무도 허전하고 외로웠다. 보석을 지녔다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누구에게 빼앗겨버린 것 같은 아쉬움과 슬픔으로 망연자실했던 그때의 심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며칠 있으니까 나를 데리러 서굴암에서 여환 스님이 도착했다. 여환 스님은 얼마 전 교육원장을 지냈던 무비 스님과 쌍계사 강원 강주인 통광 스님의 은사이다. 내가 여환 스님 밑에 있다가 중이 되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사형사제간이 되었을 것이다.
지리산 가는 것이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 어이없고 화가 나서 입을 다문 채 여환 스님을 따라 가면서 나는, ‘잘 하려고 했는데 이런 운명에 걸려버렸구나, 나는 업이 많은 사람이구나, 우리 스님을 어디 가서 만나지’ 하고 생각했다. 일고여덟 시간을 걸려 오후 세시에 연곡사 들어가는 입구에 내려서 삼십릿길을 올라가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문둥이들이 이불을 짊어지고 두세 명씩 밥을 얻어먹으려고 몰려 다니는 것을 보니, 어렸을 적 ‘문둥이가 애들 잡아다가 술 해먹으면 문둥이 병이 낫는다’는 소리를 들었던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노릇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문둥이 밥이 되는가 싶어 가슴을 졸였는데, 아, 그때 지리산 단풍은 왜 그리 아름답고 산자락마다 머루·다래는 어찌 그리 출렁이던지…….
육이오로 폐허가 된 연곡사를 지나 자그마한 토굴인 서굴암에 이르자 길쭘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사십대로 보이는 한 스님이 나와 우릴 맞았으니, 지효 스님이었다. 지효 스님은 내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 방안에 말리고 있는 곶감을 가리키며 ‘겨울에 저것 먹고 나하고 살자’고 했고, 말없이 시무룩해서 앉아 있는 내가 안돼보였는지 여환 스님은 ‘겨울에 여기 있다가 봄에 범어사에 가서 계 받으면 된다’고 달랬으나 화가 난 내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런데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여환 스님이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감나무에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나이가 어렸어도 또래에 비해 야물쳤던 나는 그때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면서, 보따리를 집어들고 벌떡 일어났다. 1백 개의 계단을 구르릇 내려와 죽을 힘으로 한참 달리다가 뒤돌아보니 여환 스님이 쫓아오는 게 보였다. 저녁 어스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미 어둑해진 산자락을 내려오면서 제일 겁났던 것은 나를 잡아다 술을 해먹을지도 모를 문둥이였으나, 다행히도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 차가 다니는 마을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숫기가 없어 마을 집에 잠재워 달라는 말도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 부산으로 가는 차를 탈 요량으로 논둑 밑에서 날을 새우려고 웅크리고 있는데, 늦게까지 보리를 갈고 오던 어른이 ‘차 타기 전에 굶어죽고 얼어죽겠다’며 바로 한길 옆의 사랑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다행히 여환 스님은 그날 밤 나를 찾으러 마을까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버스를 타고 구토를 하고 사경을 헤매며 오던 길을 되짚어 범어사로 들어가 어산교에 이르니, 소나무에 걸린 달빛이 그리도 청명했던 새벽예불 무렵이었다. 내가 원주실로 들어서니 원주스님과 당시 별좌스님이었던, 지금 쌍계사 조실스님으로 계신 고산스님이 ‘이놈이 귀신이 아니냐, 어제 연곡사 보냈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깜짝 놀랬다.
하룻밤도 안 자고 돌아온 나를 두 스님은 크게 야단치지 않고 ‘이놈, 발목 부은 것 봐라. 이렇게 독해서 나중에 뭣이 되려고 그러니’ 하면서 찬물을 가져다 담가주고 주물러주고 그랬다. 나로선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던 그 길을, 지금 되짚어 그리 하라면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나의 행자시절은 그렇게 찐했다.
서굴암으로 다른 행자를 보내야지 하고 있는데, 한 주 뒤에 ‘영운(당시 나의 이름)이란 놈이 필시 다른 데로 안가고 그리로 갔을 터이니, 옷 벗겨 내쫓으라’는 여환 스님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러나 스님들은 내게 편지를 읽어주었어도 나가란 소린 하지 않았다. 착하고 성실했던 덕을 보았을 것이다. 그 뒤 고산 스님과는 인연이 깊어, 내가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전에 종회의장을 지냈던 설정 스님과 다투다가 힘에 달려 하소연하면 설정 스님을 혼냈고, 우리 스님이 나를 방에 가두고 죽비를 내리칠 때면 문을 따주어 도망가게 하곤 했다.
어쨌든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범어사에서 다시 행자생활을 했으나, 내 마음은 자나깨나 우리 스님이 걸망 지고 떠난 정혜사라는 곳에 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 수덕사 근처 삽교가 고향인 한 스님이 방부를 들이고 채공을 하고 있어, 그분에게 수덕사 가는 길을 자세히 물어 공책에 적어두고 있다가, 삭풍이 불던 겨울 어느 날, 금정산에 산불이 나서 모든 스님들이 불을 끄러 나간 사이에 보따리를 싸들고 범어사를 나왔다. 두 번째 도망이었다. 차비도 한 푼 없이 부산진역까지 걸어나와 천안에서 갈아탈 요량으로 서울 가는 완행열차에 올라탔다.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아 차비도 받지 않으니 차표 끊을 일도 없었다. 열차를 타고 가는데 어린애 같은 조그만 승려가 보따리 하나 들고 앉아 있으니까 곁의 사람들이 자꾸 ‘절에는 왜 갔느냐, 왜 승려가 되었느냐, 절에 가면 무얼 하느냐’ 하고 물어왔다. 어려서부터 논리정연하게 말을 야물치게 잘했던 내게 그러한 물음들은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신이 나서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우고 나서, ‘무슨 일이든 처음 마음 잘 가져야 한다’고 법문 아닌 법문을 했더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신기한 듯 바라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새벽에 눈보라 휘몰아치는 천안에서 내려 철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막사에서 밥까지 얻어먹고 삽교로 가는 차를 태워주길래 예산에서 내려 덕산까지 가서, 걸어 걸어서 수덕사에 들어갔더니, 참하게 생긴 조그만 승려 하나가 물었다. ‘워디서 왔어?’ 낙엽을 때서 사시 마지를 준비하고 있던 설정 스님이었다. 나보다 늘 한 수 위였던 그와는 그후 티격태격하며 정을 쌓으며 도반이 되었는데, 그에게 누룽지밥을 얻어 먹고 우리 스님이 머물고 있는 정혜사로 올라갔다. 정혜사 앞에 쌓인 눈이 석양의 서해 햇살과 마주쳐 어찌나 맑은지 무슨 천상세계에 온 것 같았다.
우리 스님을 그렇게 다시 만났다. 얼마나 그리웠던 분인가. 노란 천의 혁띠가 밖으로 나온 채 스님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나는 말없이 눈물만 쏟고 있었다. 당시 정혜사 선방에는 금봉 스님이 조실로 계셨고, 전강 스님, 호명 스님 등이 머물고 있었다. 우리 노스님인 고봉 스님이 강주 자리를 내놓고 가서 입승을 보고 있었고, 우리 스님이 노전을 보며 참선을 하고 있었다.
지쳐 있는 나를 데려다 조실스님이 계신 뒷방에 놓고 이불을 덮고 나가는 우리 스님이 어린 소년인 나에겐 관세음보살로 느껴졌다. 세상에 그렇게 넉넉하고 맑은 기운은 처음 느꼈는데, 어려서 느낀 그 정신으로 내가 중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날 오후에 우리 스님이 내 머리를 깎아주었다. 지금도 정혜사에 가면 만공 스님이 만든 큰 돌로 만든 수각이 있는데, 맑은 물이 흐르던 수각 앞에서 우리 스님이 삭발을 해주며 그랬다. ‘너는 업이 두터우니까, 참선해서 견성하기보단 부처님 경전을 배워서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얘기 해주는 것이 업장도 녹이고 좋다’고. 그러면서 ‘나는 나이가 상좌 들일 나이가 아니니 노스님 시봉을 들면서 있겠느냐’고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어려서 상좌를 못 들이지만 노스님을 시봉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상좌를 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식으로 나는, 그리도 그리던 우리 스님의 첫 상좌가 되었다. 내가 열셋, 우리 스님이 스물아홉일 때였다.
그런데 정혜사 선방에선 행자를 둘 수 없다 하여 그 추운 겨울 다시 수덕사로 내려왔다. 나와 같은 또래지만 이미 계를 받은 사미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던 추운 어느 날, 찬을 만들려고 달래와 씀바귀를 캐고 있는데 누가 등을 두드려 올려다보니 우리 스님이었다. 어린 상좌를 보내고 안쓰러워 내려와 본 것이었는데, 그날 밤 홀로, 스님이 건네준 맨소래담을 터진 손에 바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하는 벅찬 가슴으로 그때 그렇게 가장 진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지금도 우리 스님이 무섭다. 나에 대한 터럭 끝 하나까지도 확인하고 투명하게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망상을 피울 수가 없다. 지금도 초발심 때의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스님을 찾아 뵙고 마흔 몇 해 전의 행자시절처럼 꿇어앉아 훈도를 받는다. 우리 스님은 신심이 굉장해서 열두 시간씩 기도하는 것은 보통이었고, 상좌인 내가 찬 빨래를 못하고 있으면 빼앗아서 꽁꽁 언 얼음을 깨고 끄떡도 안하고 빨아 넌 분이었다. 얼마나 엄격한 모범생이었으면 해인사에 있을 때 ‘해인사 육군사관학교 연대장’이라고 소문이 나겠는가. 그래서 나는 열댓살 때부터 두보의 시나 도연명의 시를 많이 외우고 다녔다. 우리 스님의 무서운 눈초리를 그걸로 녹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님은 맑고 깨끗했으며 숨기고 감추는 것은 눈꼽만큼도 없는 분이었다. 한 번 외운 선시禪詩는 물론, 우리 나라의 불교 역사며 문화, 《동국여지승람》에 얽힌 이야기 등을 실타래 풀어내듯 하는 걸 보면 ‘불망념지不忘念知 장엄장해탈莊嚴藏解脫’을 얻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말로, 절에 일찍 들어와 출가의 길을 걸으면서 나만큼 고생하고 아파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 생각을 해보는데, 나의 도반들은 ‘이가 버글대는 객실에서 한번잔 적이 없는 주제에 그런 소릴 한다’고 하니,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모르겠으나, 이제 나이 예순을 넘어 선禪도 그렇고 도道도 그렇고 허전하고 외로울 나이이다.
그러나 요즘 나는 불국사 석굴암에서 아침, 저녁 예불을 드리다보면 부처님의 무릎이나 손에서, 부처님이 성도할 때 그 환희의 율동적인 즐거움, 그리고 몸으로 표현되는 보이지 않는 진리의 비로자나불의 응어리진 색깔이 뭉뚱그려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도량이 맑으니 별빛도 달빛도 사람의 모습도 나하고 똑같은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예순이 넘어 체감하고 있다. 풀포기 하나를 보면서도 법계의 살림살이가 느껴진다. 옛날 어른들도, 부처님도 그렇게 살지 않았나 싶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진심으로 도를 위해 출가하였다면, 《신심명》이나 《증도가》 혹은 《초발심자경문》 등 경전 하나를 삼천 번 이상 읽어서 그것으로 자신이 지닌 고정관념을 죽여야 한다. ‘이거 아니면 나 죽는다’ 하는 각오로 덤벼들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게 출가의 길이다. 행자시절은 그것을 감지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