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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에서 오는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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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4년 02월 264호
삶의 여유라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삶의 속도가 빠르거나 느리고의 문제가 아니며, 고금古今의 문제는 더더욱 아닌 것 같다. 우리 출세간에 사는 스님들의 생활도 세간의 삶의 속도와 무관하지 않다. 삶의 패턴이나 속도를 정신없이 쫓아가서도 안 되겠지만 무관해서도 안 되는 것이 우리 출세간 사람들이 마음 써야 할 부분이고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유정무정의 세계에서 인천의 스승이고자 수행하는 사람들임을 자부한다면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할지언정 어줍잖게 뒤쫓아가면서 흉내나 내서 될 일이겠는가. 도심에서 교육이나 복지, 포교일선에 있는 스님들은 시대의 변화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대중 앞에서 눈 밝은 길잡이가 되고자 한다면 어느 분야에서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배우고 노력해서 자신감 있게 포교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도 아니라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듯이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그런 안목이라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먼저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스님들이 수행생활에 당당함이 있고 자신의 소임에 자신감이 있어야 할 것이며, 불자들이 사회에서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고 사는 불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이 학교에서나 어른들이 직장에서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부모님은 불교인데요….” “우리 집사람은 절에 다니는데…”라고 어정쩡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감 없는 불자를 만들어서 되겠는가. 물론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생활의 개인차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우리 승가의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질적인 교육부재에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전반적인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그동안 우리 승가도 변화의 흐름에 따라 외형을 갖추는데 유형무형으로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동안 부처님과 고승대덕들의 말씀이 산중에서 도심으로 사람들 발길을 따라 내려왔고, 사찰이 산중에서 대중들 가까이로 공간 이동을 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자들의 마음에서 실천을 통해 생활 속으로 젖어드는 데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천칠백년 유구한 불교역사라는 말은 접어두자. 오히려 너무 유구한 역사라서 긴장하지 않고 살아온 부분도 있고, 유구하게 전승해오느라 힘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상하고 무상한 사람과 사람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일이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말씀은 좀 뒤로 하자. 오는 사람 적극적으로 부처님 말씀에 머무르게 하고 가는 사람 다시 오게 하자는 캐치프레이즈는 어떤가. 이제는 부처님 도량에 오고가는 불자를 강 건너 불 보듯이 바라보는 것이 미덕은 아니다. 부처님 말씀을 자신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며, 산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공양 한 그릇 베푸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다. 종무소에서 축원 카드만 잘 쓰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결혼날짜 이사날짜 등을 택일 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인연을 맺어주는 방편이 된다고 하지만 우리 승가의 수행정신과 교육, 포교와 복지며 역경불사에 있어서 근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직도 본말이 전도된 우리 승가의 풍습이 있다면 과감하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변화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라는 것,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쉬운 일일 수도 있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확신과 부처님 제자로서의 자부심만 있다면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있을까? 바로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그 한 생각만 마음에 머물게 할 수 있다면 이 시대의 불교가 곳곳에서 시대를 따라 새롭게 거듭날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사상四相을 비우라는 말보다는 내가 먼저 한가지라도 비우고자 노력하고, “깨닫고 난 후에”라는 말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위치와 역할이 깨달음으로 가는 단단한 한 걸음임을 확신하고 이 길을 통해 깨닫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한다. 도심에서 산을 그리워하고 산에서 도심을 생각하며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기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수처작주隨處作主 하자. 그래야만 내 삶에 주인공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잃어버렸던 마음의 여유도 찾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의 여유라는 것, 누가 내 여유를 훔쳐 간 것도 아니고 빼앗긴 것도 아니며, 물건을 잃어버리듯이 어딘가에 흘려버린 것도 아닌데 나는 이렇게 여유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에 어디에다 잃어버렸단 말인가. 불을 빌려 밤 시간을 대낮처럼 쓰기도 하고 자동차의 힘을 빌려 걷는 시간을 줄이기도 하며, 산에서 나무를 해서 지피던 군불은 손가락 하나만 빌리면 보일러가 대신해준다. 이렇게 생활 저변에 필수품으로 함께 하는 편리한 기계들의 도움을 많이도 받고 살면서도 여유를 잃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잃은 것이 아니라 잊고 지냈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산길을 한적하게 걸어볼 여유도 없고 특별한 날이 아니면 몇 시간씩 한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을 바라볼 시간도 없다. 손과 발이 감당했던 그 시간들이 다 여분으로 남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바쁘고 분주한 생활이다.
몇 년 전 어느 주말에 춘천 봉덕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혜욱 스님과 천주교 춘천교구 장익 주교님을 뵙기로 마음먹고 전화를 드리고 들렀다. 장익 주교님은 평소 알고 있던 내가 방송을 하고 있는 그 진명이 아닌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며 반가워 하셨다. 마침 내 소임이 방송을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주교님은 영국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 BBC 방송국에서 방송 메카니즘에 대해서 견학하고 공부했던 시절을 떠올리시면서 자상하게 경험을 전해주시고는, 방송하는 어려움과 방송의 여파에 대한 책임과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나지막한 소리로 말씀을 하시는 주교님은 우리 어른스님을 뵙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참 자상하신 어른이시다.
우리 선원에서는 스님들의 수행생활에 결제와 해제가 있어 철저하게 몸을 한 곳에 머물게 하며 공부를 챙기는 시간과 운수행각을 통해 공부에 대한 점검을 받거나 건강을 돌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시간이 있는 반면에 포교일선에 있는 스님들에게 휴년제라는 것은 아직 없다. 그런데 그때 장익 주교님은 천주교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소임을 이행하다 소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쓸 수 있는 휴년제를 도입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던 중이었다. 우리도 그 제도가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이고 듣던 중이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참 편리해 졌는데도 한결같이 주부들이 바쁘다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라며 웃음 섞인 여담을 하셨다. 손수 짓던 밥은 전기밥솥이 대신해주고 온 가족들의 많은 빨래는 세탁기가 대신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대신하는 그런 세상인데 왜 주부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러고 보면 주부들밖에 할 수 없는 육아부터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일인 다역을 했던 그 옛날 그 시절이 오히려 삶에 여유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면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은 필요한 시간에 여유를 만들어가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해가 저무는 저편으로 또 사라진다. 내 삶에 무엇이 더 소중하고 우선되어야 하는 일인지 살피는 여유를 잃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