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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선원장 철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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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해인 2004년 02월 264호
내소사 오는 길의 작은 도시 부안은 온통 ‘핵 폐기장 반대’라는 노란색 스티커 일색이다. 아름다운 절 내소사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설선당 앞 뜰에서 부안군수가 주민에게 몰매를 맡는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외지 사람들이 오면 한결같이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 통에 팻말 하나 세워야 할 판이란다.
2001년 개원한 내소사 선원은 이번 동안거까지 쳐서 다섯 안거를 성만한 선원으로 첫걸음마를 시작한 셈이다. 물론 해안 스님이 서래선림西來禪林에서 사부대중을 향해 열었던 불교전등회를 생각한다면 60년대까지 거슬러올라 가게 된다.
해안 스님은 유홍준 씨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소개된 바 있지만 부안 일대에서는 아직도 스님에 대한 일화들이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선사로 포교사로 도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분이다. 쌀 한 톨이 아쉬웠던 보릿고개 시절, 매년 쌀 한 가마를 내걸고 <금강경 외우기대회>를 열어 부안 일대에 금강경외우기 열풍을 일으킨 얘기며, 정읍의 유지 일가족이 스님께 출가한 얘기, 신태인에서 소아마비 아이를 기도로 고친 이야기 등등….
전나무숲길 중간쯤 오다보면 우측으로 지장암이라는 돌로 된 경계석이 보인다. 표시대로 50여 미터만 가면 지장암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해안 스님이 주석하시며 후학들을 가르쳤던 서래선림이다. 우연히 이곳에서 만난 묵천이라는 문인화가(국전작가)는 해안 스님 글씨는 도필이라 할 만하다고 감탄한다.
내소사 회주이신 혜산 스님과 선원장 철산 스님 모두 이곳 서래선림에서 해안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상좌들이다.
철산 스님은 74년 열반하시기까지 3년간 시봉을 맡았던 막내 상좌로, 해안 스님 열반하시자 30년 넘게 제방의 선방만을 오로지 돌며 수행에 전념해온 선승이다. 철산 스님이 다시 내소사로 돌아온 것은 선원 개원과 함께 한다. 서래선림에서는 그동안 전등회가 계속 이어져 왔으나 재가자 중심이었고, 철산 스님은 이제 내소사에 출가자 선원을 개원함으로써 서래선림의 맥을 다시 잇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선원의 규모는 작아 10명 정도만이 입방할 수 있다. 절 방사도 그렇고 재정 사정도 아직은 더 이상의 인원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방사를 더 넓혀서 20여 명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결제 중이라 선원장 스님이 시간을 낼 수 있을까도 걱정이었는데, 입선과 방선시간을 알리는 죽비를 친다며 몇 차례 자리를 뜬 것 외에는, 고맙게도 짧지 않은 인터뷰 시간을 기쁘게 할애해주셨다.
모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스님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스님은 편안하고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깐깐하고 고집스럴 것이라는 선승들에 대한 선입견은 철산 스님으로 인해 사라졌다.
내소사 선원의 특징은 정진 중인 스님들이 한결같이 선방 경력 15년 이상 된 구참들로, 초학자들은 선원에 입방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입방자격을 정한 것은 선원장 철산 스님. 개원 초기의 생각은 30~40년 된 수좌들이 모여 정진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가르친다는 차원보다는 그 정도의 이력을 가진 선객들을 모신다는 입장이었다.
철산 스님이 구참 수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대부분의 선원이 초학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20년 이상 된 구참 수좌들이 신참들과 함께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참들은 대체로 선원을 택하지 않고 토굴살이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름대로의 수행방식이 정해져 있고, 육체적으로도 한창인 젊은 신참들처럼 하루에 열댓 시간씩 앉아있기는 힘이 딸려요. 그래서 그런 이들만을 모아 함께 수행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철산 스님은 몇 해 전 예산의 향천사라는 절에서 30년 이상의 수행이력을 가진 구참 수좌들과 한곳에서 정진하며 지낸 적이 있었는데, 대체로 반응들이 좋았다. 그래서 내소사에서 다시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철산 스님의 경우처럼 선방의 선원장을 맡아 가기도 하고, 이미 토굴살이를 결정해 떠난 이도 있었다. 그래서 20년으로 낮춰 잡았는데도 그런 수좌들이 흔치 않아 선방이력을 최대한 하향 조정하게 된 것이 15년이다.
10년만 넘으면 수행을 누가 하란다고 하고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는 단계는 지났다. 수행을 해나가는데 있어서도 자기 나름의 방법이 터득된 터.
그러나 토굴살이 10년이 대중처소에서 한 철 나는 것만 못하다는 앞선 이들의 말씀이 있듯이, 혼자서는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도 대중살이는 그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생활이 수행에 더 도움이 된다며 토굴생활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나무도 마찬가지예요. 혼자 있으면 가지만 많고 키가 안 자라지만, 여러 개가 모여 있을 때 곧게 잘 자라 기둥감이 되는 겁니다. 총림叢林이 바로 그런 의미인데, 여럿이 모여 정진하면 공부하기 싫어도 남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게 되니까.”

철산 스님은 자신은 그저 수행해 나가는 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과 다름없다고 자세를 낮춘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방 풍경, 즉 죽비 들고 지나면서 행여 졸음이 쏟아져 자세 흩어지는 수좌 있으면 어깨를 힘껏 내리치는 모습을 여기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철산 스님은 오히려 가끔 수좌들 눈치 볼 일이 생긴다고 한다. 사중 일이 생긴다든지, 지금처럼 누가 찾아와 부득이하게 만나야 할 경우가 생기는데, 중간에 일어나 나오는 일이 있을 경우 수좌들로부터 자제를 요청받기도 한다. 선방은 살기 감도는 전쟁터니까.
“전쟁터도 그냥 전쟁터가 아니라 총에 칼을 꽂고 맞붙어서 싸우는 육박전의 현장이야. 마구니와 정법이 싸우는 전쟁터. 그러니 한눈 팔 새가 어디 있어. 그 틈을 타 언제 마구니가 들어와 내 몸을 찌를지 모르는데. ”
이러니 수좌들 신경이 예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함께 공부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해야 할 일이라고 철산 스님은 생각하고 있다. 물론 스님에게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나름의 지도방법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꺼낼 단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30년 넘게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등 제방의 선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참으로 많은 큰스님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지금까지도 철산 스님은 “오직 해안 스님뿐”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철산 스님에 따르면 해안 스님의 가르침 방식은 좀 달랐다. 제방의 선방에서는 일단 안거가 시작되면 책도 멀리하고 오직 앉아서 정진하지만 서래선림에서는 일주일이나 2주일 정도 용맹정진 기간을 정해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울력도 하고 경도 보고, 논강도 하고 의식도 공부하는 등 부족한 모든 것을 다 한다. 선 아닌 것이 없고 생활이 그대로 선이라는 것이 스승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해인사니 통도사니 봉암사 등의 선방이 금방金房(진금포眞金鋪)이라면 자신의 지도방법은 잡화상雜貨商(잡화포雜貨鋪)과 같다고 했단다.
다만 일주일 정도의 용맹정진 기간을 정해 확실하게 학인들을 경책하고 수시로 불러들여 공부를 체크함으로써 딴생각을 못 가지게 했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소금 반찬만을 주는 벌을 주기도 했다. 철산 스님은 이 기간의 해안 스님은 마치 성난 사자를 보는 듯 했다고 한다.
용맹정진 기간 중에도 예불은 꼬박꼬박 했고 반드시 《금강경》과 《원각경》을 독송케 했다. 3~4일은 관음주력을 하게 했는데, 주력으로 업장소멸이 돼야 화두도 잘 들린다는 것이었다.
정진기간은 대체로 일주일 정도로 잡았다. 2주일 내지는 3주일을 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드문 경우다. 기간이 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초장에 화끈하게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었다.
“깨달음도 머리 깎고 초발심 즉 아무것도 모를 때 선지식 만나 깨달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오래 하면 요리조리 들은 풍월이 있어서 뜯어 맞추고, 3년 넘으면 장판때가 묻어서 기름 바른 나무처럼 일으켜 세우려면 미끄러지기만 한다고 하셨지.”
그 과정에서 선지식의 책임도 강조해, 선지식이 자꾸 분심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안 스님은 실제 그렇게 열심히 제자들의 분심 유발을 위해 애를 쓰셨다고 한다.
“해안 스님 외에 어느 스님께 가까이서 가르침을 받았던 기억이 없어요. 그저 멀찍이서 지나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그러나 해안 스님은 수좌들의 화두를 죽 꿰고 앉아서 용맹정진 기간에는 하나하나 챙기셨거든. ”
직장생활을 하다가 삼보법회에서 해안 스님의 《금강경》 4구게 법문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출가를 결심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너무 완벽했다. 어렵고 무서워 그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쓰레질 하나 제대로 못하다보니 얼마나 야단을 맞았던지. 원래 천성이 순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속가에 있을 때는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출가해 스승으로부터 쏟아지는 구박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산속으로 도망가기도 했다는데, 결국 스승의 꾸지람은 나의 자질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고깝게 여긴 적이 없다.
스승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야단을 칠 것인가. 그리고 후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한 스승의 노력이었음을 알게 되어 감사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스님 열반하시면서 시봉하던 철산 스님에게 ‘ 내 전재산’이라며 남겨주신 돈이 3만원. 살다보면 필요할 때 있을 거라며 주신 것인데, 스님 재 올릴 돈이 없어 써야만 했다. 그만큼 남김없이 살다 가신 분이다. 해안 스님께 가르침 받던 시절 서래선림은 밥 한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어려운 살림이었다. 스님 열반 후 큰절 선방에 갔는데, 어찌나 풍족하던지 살찌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가장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시기, 그래도 스님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고 옆에 자신을 꾸짖을 수 있는 선지식이 있어 공부할 수 있었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스님과 한참을 이야기한 것 같은데, 돌아서 생각하니 본인 얘기는 거의 없고 절 얘기며 스승 얘기뿐이다. 그러나 후에 돌아보면 그게 바로 철산 스님 본인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가슴 속에 담고 사는 스승의 모습은 바로 후일 자신의 모습이 된다지 않는가.
방을 나서며 스님 앉아 계신 자리 뒤편 벽에 소박하게 쓰여진 황벽 선사 글이 난데없이 눈에 들어온다.
“세간의 번뇌를 벗어나기는 참으로 어렵네. 굳게 마음을 다잡고 힘껏 노력해보게. 한번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매화의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닿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