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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선일여茶禪一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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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설곡 2004년 02월 264호
조주 스님의 끽다거喫茶去
선가에는 차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차와 선이 한가지(茶禪一如)라고 하며, 선을 수행하는 것이나 다도를 수행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또 차를 일러 달마의 눈이라고도 한다. 달마가 좌선 중에 졸음이 심하여 견딜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눈알을 뽑아 마당에 던져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었는데 제자들이 그 잎을 달여먹고 나서부터 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차와 선사의 이야기라면 조주의 끽다거喫茶去를 맨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주 스님은 누가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든지 그의 대답은 한결같이 ‘차나 한 잔 하고 가게!’였다. ‘스님 공양하셨습니까?’ ‘스님,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등의 가벼운 안부에서부터, ‘스님, 어떤 것이 불법의 진정한 대의大意입니까?’ ‘어떤 것이 도입니까?’ 등의 진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스님은 예외 없이 똑같은 대답으로 응대했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차는 우리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우리 땅에는 좋은 물이 얼마든지 많기 때문에 특별히 차를 끓여 마실 필요 없이 생수를 그대로 마셨다.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생수가 일상적 음료였고 차는 특별한 마실 거리였다. 그러나 물이 좋지 못한 중국에서는 차를 끓여 마셔야 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차 문화가 발전했다. 그들에게 있어 차는 우리가 마시는 물보다 더 일상적인 음료다. ‘차나 한 잔 하고 가게!’란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차나 한 잔 하고 가게!’의 말씀은 도란 무엇인가, 혹은 ‘불법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그 질문을 뿌리부터 잘라내는 선적禪的인 선포다. 불법의 진정한 대의에 간절하게 집착하는 제자의 심중을 간파한 스승은 특별한 그 무엇에 집착하는 그의 사량과 분별을 뿌리째 잘라준 것이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이 대답에 질문자는 모든 사량과 분별을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모든 집착과 분별을 놓아버리고 나면 그때 할 일이야말로 일상적이고도 일상적인 차나 마시는 일밖에 달리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졸리면 잠자고 목마르면 물 마실 일밖에 특별한 일이 없는 것이다. 선은 이래서 통쾌하다.
선은 깨달음이든 도든 선이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일상 가운데서 행복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이렇듯 선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데서 성취하는 행복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명선茗禪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면, 바로 그 사실을 글자로써 표현한 작품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115.2×57.8cm크기의 종이에 묵으로 쓴 예서隸書체의 글씨다.
추사의 이 작품은 차를 의미하는 명茗이라는 글자와 선禪이라는 두 글자인데 그야말로 차와 선이 둘이 아닌 경지를 보여준다. 이 두 글자는 예서이지만 꾸밈이나 억지를 부린 바가 전혀 없어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힘찬 기운이 돋보인다. 서법과 격식이 분명한 예서이면서도 그 격식을 넘어서는 탈속과 자유분방의 멋이 가득하다.
“초의草衣가 손수 만든 차(명茗:아주 거친 잎으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蒙頂(사천성 명산현 몽산蒙山에서 나는 천하제일의 상품 차)이나 노아露芽(강소성 강령현 동남방산東南方山에서 나는 유명한 차) 같은 명품보다 못하지 않다. 이 글로 그에 보답한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2세기 후한 때의 예서체로 쓴 비석)를 본따 쓰다. 병거사病居士의 예서隸書”라고 제題를 붙였다.
초의나 추사는 당대부터 천하에 이름을 떨친 선과 예술의 달인들이다. 그들의 행적과 작품마다 선적 예술의 풍취가 넘친다. 허나 이 작품은 굳이 이들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그대로 선의 경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가시나무 울타리 친 바다 멀리 제주도 유배지의 동갑내기 수십 년 친구를 위해 보낼 선물 품목은 무엇이 좋을까? 그를 위로할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다. 초의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차, 거친 잎으로 만든 차를 선물한다. 부드러운 잎으로 명품 차를 만들 시기를 놓쳐서일까? 만들어놓은 상품上品 차가 다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일부러 유배자의 심정을 헤아려 거친 차를 보냈을까?
나는 여기서 선 수행자가 갖는 일상의 의미를 읽는다. 이 세상에 사형수 아닌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사형수들이다. 이 세상에 유배지 아닌 곳은 어디인가? 우리 모두 감방에 갇힌 죄수다. 직장에 갇히고 아내에게 갇힌, 월급봉투에 족쇄 채인 죄수다. 어디 그뿐인가? 인위적 개념과 이념으로 스스로를 꽁꽁 묶어놓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모든 집착을 풀어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 그뿐이다.
유배에 얽혔을 억울함을 비롯한 수많은 심정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없다. 그저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게 ‘차나 마시라(喫茶去:여기서 ‘去’를 ‘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고 있으라, …나 하고 있으라는 뜻의 허사로 보는 이들도 많다)’고 권한다. 유배당한 친구에게 그저 일상처럼 지내라는 말보다 더 멋진 말이 무엇일까.
붓을 들어 답한 추사의 선적 풍미도 초의 못지 않다. 우리 같았으면 고맙다는 인사치레서부터 미주알고주알 유배에 얽힌 넋두리를 풀고자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추사의 답은 단 두 마디, ‘차 그리고 선’, 혹은 ‘차 같은 선’, ‘선 같은 차’다. 추사가 이 두 마디 속에 담았을 그 무궁한 이야기들은 지금 이 글씨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일 뿐이다. 추사는 그저 수십 년 지기 친구가 보낸 차를 앞에 두고 거기 잠겼다. 아니 그저 차나 마시는 일상적 행동에 잠겨 모든 것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의 선적 거래去來가 멋지다.
추사의 자호自號 병든 거사(病居士)는 그 유명한 유마 거사의 호다. 이 이야기를 선으로 풀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