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 스님의 끽다거喫茶去추사 김정희의 명선茗禪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면, 바로 그 사실을 글자로써 표현한 작품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115.2×57.8cm크기의 종이에 묵으로 쓴 예서隸書체의 글씨다.
추사의 이 작품은 차를 의미하는 명茗이라는 글자와 선禪이라는 두 글자인데 그야말로 차와 선이 둘이 아닌 경지를 보여준다. 이 두 글자는 예서이지만 꾸밈이나 억지를 부린 바가 전혀 없어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힘찬 기운이 돋보인다. 서법과 격식이 분명한 예서이면서도 그 격식을 넘어서는 탈속과 자유분방의 멋이 가득하다.
“초의草衣가 손수 만든 차(명茗:아주 거친 잎으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蒙頂(사천성 명산현 몽산蒙山에서 나는 천하제일의 상품 차)이나 노아露芽(강소성 강령현 동남방산東南方山에서 나는 유명한 차) 같은 명품보다 못하지 않다. 이 글로 그에 보답한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2세기 후한 때의 예서체로 쓴 비석)를 본따 쓰다. 병거사病居士의 예서隸書”라고 제題를 붙였다.
초의나 추사는 당대부터 천하에 이름을 떨친 선과 예술의 달인들이다. 그들의 행적과 작품마다 선적 예술의 풍취가 넘친다. 허나 이 작품은 굳이 이들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그대로 선의 경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가시나무 울타리 친 바다 멀리 제주도 유배지의 동갑내기 수십 년 친구를 위해 보낼 선물 품목은 무엇이 좋을까? 그를 위로할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다. 초의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차, 거친 잎으로 만든 차를 선물한다. 부드러운 잎으로 명품 차를 만들 시기를 놓쳐서일까? 만들어놓은 상품上品 차가 다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일부러 유배자의 심정을 헤아려 거친 차를 보냈을까?
나는 여기서 선 수행자가 갖는 일상의 의미를 읽는다. 이 세상에 사형수 아닌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사형수들이다. 이 세상에 유배지 아닌 곳은 어디인가? 우리 모두 감방에 갇힌 죄수다. 직장에 갇히고 아내에게 갇힌, 월급봉투에 족쇄 채인 죄수다. 어디 그뿐인가? 인위적 개념과 이념으로 스스로를 꽁꽁 묶어놓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모든 집착을 풀어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 그뿐이다.
유배에 얽혔을 억울함을 비롯한 수많은 심정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없다. 그저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게 ‘차나 마시라(喫茶去:여기서 ‘去’를 ‘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고 있으라, …나 하고 있으라는 뜻의 허사로 보는 이들도 많다)’고 권한다. 유배당한 친구에게 그저 일상처럼 지내라는 말보다 더 멋진 말이 무엇일까.
붓을 들어 답한 추사의 선적 풍미도 초의 못지 않다. 우리 같았으면 고맙다는 인사치레서부터 미주알고주알 유배에 얽힌 넋두리를 풀고자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추사의 답은 단 두 마디, ‘차 그리고 선’, 혹은 ‘차 같은 선’, ‘선 같은 차’다. 추사가 이 두 마디 속에 담았을 그 무궁한 이야기들은 지금 이 글씨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일 뿐이다. 추사는 그저 수십 년 지기 친구가 보낸 차를 앞에 두고 거기 잠겼다. 아니 그저 차나 마시는 일상적 행동에 잠겨 모든 것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의 선적 거래去來가 멋지다.
추사의 자호自號 병든 거사(病居士)는 그 유명한 유마 거사의 호다. 이 이야기를 선으로 풀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