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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우울, 그리고 고단한 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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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최창조 2004년 02월 264호
유사 이전부터 곧 세상에 말세가 온다는 풍문은 인간 세계에 꾸준히 있어 왔다. 지금까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요즈음도 마찬가지로 말세라고들 떠든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현대 인류는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만 생각해보아도 분명한 사실이다.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핵무기의 폭발로 인한 파괴력과 실제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환경 오염으로 인한 지구 종말론이 그렇다.
그래서인가, 세상은 극도로 어수선하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살벌하다. 나는 지금 인류의 장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처지도 아니고 그것을 귀납적으로 풀어낼 어떤 근거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 감성이랄까, 직관이랄까, 그런 것의 작동에 의한 느낌일 뿐이다. 나 자신과 내 가까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아도 말세에 가까워진 인간들의 심리에 있기 마련인 공포와 불안이 터질 듯 팽배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얼마 전 “술 전쟁 같은 사랑의 기록(DRINGKING, A LOVE STORY)”이란 책의 번역본을 읽으면서 심각하게 자신을 되돌아본 경험이 있다. 이 책을 보니, 나는 엄연한 알콜 중독자였다. 아이비 리그 출신의 여성 칼럼니스트의 자전적 기록인데, 미국과 한국이라는 문화적 사회적 차이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내 얘기인 듯 싶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면 사회 관계를 원만히 이끌어가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자기보다 더 엉망으로 취한 채 자포자기 상태로 말하고 행동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아니야, 난 아직 저렇지는 않아”라고 자기 위안을 삼는 행위도 그렇다.
한 가지 크게 나와 다른 점은 이 여성이 술을 대부분 남 몰래 마셨다는 점이다. 그건 우리 사회와 달리 미국에서 적용되는 엄격한 술에 대한 타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반면 우리 사회는 술에 대해 지극히 관대하다. 명백한 알콜 중독자들을 우리는 그저 술 좋아하는 사람으로 대해주거나 술을 먹고 심한 말썽을 피워도 ‘저 사람 주사酒邪가 좀 심해서 그래’ 하는 식으로 넘어간다. 그러니 나는 술을 몰래 마실 필요가 없다. 우리 주위에는 전문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는 알콜 중독자들이 즐비하다. 그저 애써 그런 사실을 회피해 왔을 뿐이다.
우울증은 어떨까? 이 문제는 더 심각하면서도 알콜 중독보다 더 숨겨져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즘 병으로서의 우울증이 아닌 정도의 우울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객관적으로도 우리의 주위 환경은 그야말로 자연 환경이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인위적 환경이든 총체적으로 우울을 부채질한다. 학회의 보고로도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우울증 환자가 가정 주부 중 15%에 이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내가 병에 걸렸소’라고 말하지도 못하며 그저 내 의지가 박약해서 아니면 자기의 주변 여건이 그래서, 예컨대 ‘시어머니 때문에’ 하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한다. 우울증은 명백한 이유가 있어서 생기는 그런 류類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몰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저 사람 아직 배고픔을 알지 못해서 그래”라거나, “한번 뼈 빠지게 고생해보면 저런 소리 다시는 안할거야”라는 정도로 치부하고 만다.
가까이 지내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호소해봐도 고작 듣는 소리는 “한번 다부지게 마음먹고 네 의지로 이겨나가봐” 정도일 뿐이다.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 사람보고 그렇게 해보라니, 이것은 아무리 선의라고는 해도 말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설사가 급한 사람보고 “네 의지로 참아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술이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나름대로 노력은 한다. 하지만 전문가든 누구든 깊은 이해와 연민으로 그를 돕지 않는다면 거의는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를 좀더 넓히면 현대의 모든 중독들, 그러니까 마약이든 도박이든 습관성 절도 행위든, 어떤 것에라도 중독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권장받아 마땅한 등산이라든가 테니스 같은 스포츠에도 미친 듯 매달린다면 넓은 의미의 중독일 수밖에 없다.
이런 중독 증세들의 공통된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가 중독에 빠진 일 외에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고 따라서 흥미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기력과 소외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자신과 같은 중독 증세의 사람과는 어울릴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인간 관계의 형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중독 상태에서 빠져나왔을 때 자기 자신이 뼈저리게 느낀다. 이러니 세상살이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물론 개중에는 ‘고도 적응성 알콜 중독’처럼 남이 보기에는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앞에서 소개한 책의 저자인 여성 저널리스트도 직장 생활을 잘 했고 원만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본심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희망이라든가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다. 모임에 가서도 심지어는 사귀는 남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술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 어디 재미가 나게 될 것인가.
다른 하나는 자살 충동이다. 삶에 희망이 없다면 그래서 더 이상 세상살이의 의미를 잃었다면 당연히 죽음을 생각해볼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병적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꼭 그런 이유가 있어서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 책임을 사회에 돌리고 싶어 한강대교 교각 위에 올라가 자살 시도에 대한 시위를 벌인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이 지구상에는 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무고한 사람들이 수천 수만이 죽어가는 전쟁이 일어나도 남의 일 보듯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스스로 죽으려는 한 사람을 위해서 소방관, 구조대원, 앰뷸런스, 경찰, 구경꾼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을 졸인다. 인간의 심성이란 그런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좀 과장하자면 모두가 어느 쪽이든 중독에 빠져 있다. 권력에, 돈에, 명예에, 섹스에, 자식에게, 자신의 성취에, 여하튼 모두 미쳐 돌아간다. 문제는 여기에 뾰족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치료 방법이 없는 질병, 그것은 곧 절망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지금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꼴이다. 신문이나 방송은 그런 중독증 환자들, 미친 사람들의 소식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를 탓하기에도 늦은 감이 있다. 권력과 돈의 유혹에 중독되어 자신과 세상을 망치는 사람들이 지금 넘쳐나고 있다. 특히 참여정부의 그런 부류 사람들은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들 역시 중독 환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더욱 우리가 중독되어 있던 것에 빠져들고 만다. ‘그래봤자 별수 없는 일 아니냐’고 하면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정말 불행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도 많다. 당장 지하철 역에서 뒹굴며 잠들어 있는 노숙자들, 치유 불가능한 난치병에 걸렸으나 돈이 없어 병원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 부모가 가출하여 어린 나이에 집안 살림을 떠맡은 소년 소녀 가장들을 보라. 이런 사람들뿐이랴. 길거리에서 다 시든 나물 몇 가지 놓고 하염없이 하늘바라기를 하는 할머니들, 이력서를 한 보따리씩 싸들고 어디 취직 자리 없나 떠도는 사람들, 직장에서 쫓겨나 추운 겨울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그야말로 죽이고 있는 사람들. 아, 한이 없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고 우울해지고, 나는 술 생각이 난다.
나는 공식적으로는 수계를 받은 불교 신자이지만 나 스스로 불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언젠가는 부처님의 자비를 구할 때가 올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이 중독 현상을 풀 수 있는 중요한 해결 대안으로 나는 서슴지 않고 불교를 떠올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거기서는 신을, 그것도 분명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그런 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성自性으로 자성自省하여 자각自覺함으로써 세상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거기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신을 믿다가 그 존재에 회의를 갖게 된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절망과 함께 심한 죄책감까지 떠맡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불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대단히 관용적이다. 모든 중독 치료의 출발은 타인 뿐만이 아니라 자신까지 용서하고 빈 마음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려는 바람에서 시작된다. 불교는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있다. 그런 사람들을 제도해야 할 스님들이 과연 그런 경지에 도달했느냐이다. 그것만 해결된다면 산중이면 어떻고 시중이면 어떠랴. 그런 스님 만나 위로를 받는 것만으로도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