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빛으로 물든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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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진명
2003년 10월 260호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도 해는 지고 다시 뜬다. 가을바람에 더위는 속절없이 물러나고 풀섶에서 들려오는 한 자락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심연에 자리한 먼 그리움을 일깨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깊어지면 가슴으로 지나는 세월의 뒤란도 깊어지겠지. 또 하루해가 마음의 서쪽을 향한다.
깊어지는 세월의 뒤란에 육근의 그림자가 쌓여간다. 아직은 경계 따라 시시로 변하는 마음자리에 변하지 않는 그림 두어 폭이 있다. 부처님 말씀을 처음 접했던 그 순간과 성철 큰스님 열반에 드시던 날 마음 먹먹했던 그 순간이다. 내 삶에 가장 환희로웠던 순간과 막막했던 순간이었지 싶다. 누구나 세월이 많이 흘러도 빛 바래지 않는 순간이 있어 고단한 삶을 헤쳐 가는 노가 되어 주기도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할 것이다.
지금 현재라는 바다에서 나에게 노가 되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삶에 있어 신심이 여여如如하기가 힘든 것 같다. 하루 이틀은 세상 전부가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가 사나흘은 사는 일에 신심이 바닥을 친다. 그저 호흡을 여여하게 하듯이, 들어간 숨이 나오듯이 그렇게 살면 될 일인데 어딘가에서 무슨 존재의 가치와 수행자로 사는 의미를 찾는다고 야단이다.
《본생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인생은 초대하지 않아도 저 세상으로부터 왔다가 허락하지 않아도 저 세상으로 떠나간다. 살면서 부를 이룬 사람도 많고 명성을 얻은 사람도 많다. 그러나 부나 명성과 함께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이 세상에 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렇다. 들어온 숨이 나가듯이 그렇게 온 듯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다. 가야산을 호령하던 큰스님도 부처님이 가셨듯이 1993년 11월 4일 그렇게 가셨다. 그리고 생명 있는 것은 모두 다 그렇게 떠나간다.
큰스님께서 1990년 5월 1일 불교방송 개국 축하법어를 이렇게 남기셨다. “일체를 존경합시다. 일체가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를 부처님으로 받들고 스승으로 섬기며 부모로 모십시다. 우주의 유형·무형이 이 법문을 항상 설하여 이 말씀이 우주에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모두들 귀가 있든 없든 간에 이 법문을 항상 듣고 있습니다. 더욱이 불교방송을 통하여 이 법문을 전하게 되니 참으로 금상첨화입니다. 모든 가치는 말씀에 있지 않고 그 실천에 있으니 우리 모두 선악과 시비를 초월하여 일체를 존경하여야 합니다. 푸른 허공에서 반짝이는 별님들과 둥근 달님도 쉴 새 없이 벽력같은 소리로 항시 이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일체를 존경합시다.”
일체가 부처님 아님이 없다는 말씀을 되새긴다. 불교방송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부처님 말씀을 더 널리, 그리고 더 많이 전하는 일에 힘쓰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차 한 잔의 선율’에 귀를 기울이는 모든 청취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기 때문에 청취자를 부처님처럼 대하라는 말씀이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가치는 말씀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다고 하셨다. 말은 실천을 통해서 생명력을 갖는다. 말에서 말로 끝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백마디 말이 단 한 가지 실천으로 이행되는 것이 있고 한마디 말일지라도 그 말이 진실한 가치를 가졌다면 천만 사람의 가슴에 메아리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사람들의 가슴에 맑고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길 바라며 방송실에 앉는다. 그것이 내 기도이고 수행이다. 귀가 있는 자는 귀로 듣고, 눈이 있는 자는 눈으로 듣고, 가슴이 있는 자는 가슴으로 방송을 듣고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분상을 따라 그 나름의 마음이 생긴 형상대로 듣고서 이해할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 유정과 무정, 유형과 무형이 설하는 말씀을 라디오나 TV가 보여주고 말하는 것을 기억하고 따르듯이 그렇게 생생하게 삶에 반영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TV나 인터넷에 맹신이 되어 생생한 눈과 귀를 잃었다. 살아 있는 설법을 보고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잃은 것이다. 아니 마음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마음을 잃고 물질의 맹신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기에 불교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눈과 귀를 갖추고 불보살의 마음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 길잡이가 되도록 해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이며, 불교방송을 운영하는 관리자들은 냉정하게 살펴야 할 부분이다.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불교방송이 설립된 의미와 진정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공심公心으로 임하고 있는가를 말이다.
큰스님의 1965년 김용사 동안거 결제 법어 중에 ‘수행오계’가 있다. 오래 전에 마음에 새긴 말씀인데 열반일이 다가오는 요즘 더 새롭게 마음에 와 닿는다. 그 수행오계를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는 묵언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말을 삼가라고 하셨다. 둘째는 수면을 절제하라고 하셨다. 3시간 이상 수면은 금물이라고 하셨다. 셋째는 책을 읽지 말 것을 강조하셨고, 넷째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다섯째, 과식은 금물이라고 수행자가 지켜야 하는 오계를 말씀하셨다. 한 대목이라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물론 선원이나 대중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이 못되는 까닭이기도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필요함에서라고는 하지만 깊게 새겨 볼 일이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말로써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첫째 계목부터 어기고 있는 셈이다. 입에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했던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대신해야 할 것이다. 그 오계 중 내가 가장 잘 지키는 것이 있다면 잠을 많이 자지 않는 것이다. 때론 최소한의 수면시간만 허락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몇 년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내 생활에 수면을 절제하는 좋은 질서가 되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과히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책을 읽지 말 것을 강조하셨다. 문자를 통한 알음알이가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나는 책을 필요한 만큼은 읽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대목은 지금 현재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있는 방송일이 주변지식 없이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나는 가슴이 뜨끔하다. 나는 정확한 시간에 절에서 길을 나서야 하고, 때론 공간 이동을 통해 새로운 발견이 필요하고 자신을 객관화하여 보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도 지키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과식을 금하라고 하셨다. 식충이처럼 밥을 먹지 말라는 말씀이긴 하지만 이 부분을 지키는 일은 무리가 없다. 뱃속이 빈 듯 해야 정신이 맑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어 가지는 지킬 수 있어서 좋다.
진정한 공부자는 변명이 없지만 이렇게 어설픈 변으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비추어 보지만 상황마다 경계가 다르다. 이 다섯 가지를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다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계라는 것은 소극적으로 지키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키는 것만큼 열고 막는 데도 의의가 있다고 했다. 요즘은 승가나 재가 모두 계율에 관한 정신이 희박해지고 있다. 먼저 계율은 지키는 일이 우선이 되어 계체戒體가 형성이 되고 계상戒相이 나타난다. 하지만 계를 열고 막고 범하는 일에 변명이 많고 쉽게 조사스님들의 행위를 남용한다. 큰스님께서 근 사십 년 전에 수행자 오계를 말씀하셨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수행자라면 누구나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요즈음 사회에는 어른이 없다고 쉽게 말한다. 승가도 마찬가지란다. 그것은 어른이나 스승을 찾고자 하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닐까. 완전한 사람, 완전한 선지식을 만나야 한다는 그 분별심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한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 삶은 목숨을 마칠 때까지 배우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성인이 되고 부처를 이루고자 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승가의 일원은 더 그럴 것이다. 삶에서 무엇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무지함의 발견이 아닐까. 발견된 지식은 실천을 통해 지혜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깨달은 분상에는 걸림이 없는 것이지만 분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금이 있고 위아래가 분명히 존재한다. 어른 스님 앞에서 견책을 받던 시간이 그립다.
우리의 큰 선지식, 성철 큰스님의 성성하셨던 그 눈빛이 그립다. 호탕하신 웃음소리가 그립다. 주장자에 누더기 자락으로 가야산을 가득 채웠던 그 모습은 더 그립다. 어른을 향한 그리움이 가을 산빛처럼 가슴에 물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