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세상 어느 곳 한군데 다툼이 없는 곳이 없는 듯 합니다. 사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다툼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기에 이 시대에 다툼이 좀 요란스럽다 하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인간의 세상살이가 다툼 없이 살아지기는 어려운 틀로 짜여져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지구 위에 수많은 종류의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만, 인간이란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만 일어나는 추악한 다툼들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념이 다르다고 다툽니다.
민족이 다르다고 다툽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다툽니다.
또는 이해 관계 때문에 다툽니다.
이런 사람들의 다툼은 다른 생명들이 저지르는 자신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다툼과는 다릅니다.
때로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의 지고자至高者가 자기 나라의 이익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 나라를 침공하고 무차별 대량학살을 서슴치 않습니다.
새 천년의 시대가 이념을 뛰어넘고 민족과 종교를 뛰어넘어 세계가 하나가 되는 시대로 가는 꿈 같은 세기가 시작되었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하던 때가 엊그젠데, 인류는 더욱 교활하고 잔인하게 살육의 다툼을 즐기는 듯합니다.
세계 곳곳에 물난리가 나고, 지진으로 땅이 꺼지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가뭄과 질병들이 창궐합니다.
인류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이 병들었습니다. 이 땅이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고통스런 단말마를 토해 놓고 있는 것일 겝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뿌리내려 살게 해 주는 땅에까지 몹쓸 짓을 해 이젠 땅에서 마녀 인류는 버림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일을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만으로도, 모두가 희망을 잃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일이 부끄럽게까지 하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네 정치판에서는 저급한 영혼들의 이전 투구의 싸움판이 그칠 줄 모릅니다.
땅을 사랑하고 생명을 위한 먹거리를 키워야 할 농부가 스스로에게 독을 뿌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한 나라의 기둥 하나를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재벌 총수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 감당키 어렵다하여 빌딩에서 뛰어내립니다.
오죽하면 목숨까지 끊었겠냐며 동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은 그 생명을 영적으로 진화시켜야 할 의무까지도 가지고 태어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지혜 있는 눈 푸른 이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모든 가치관이 뒤엉켜 혼돈의 먼지로 자욱한 세상을 향해 진정한 일할一喝을 해 줄 수 있는 선지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10년 전 스님께서 육체의 방편을 벗어버리고 떠나셨을 때 우리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온통 스님에게로 향했습니다. 방송이며 신문이며 수많은 언론매체들이 연일 스님의 얘기로 가득했습니다. 하물며 불교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스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참으로 큰 지혜 있는 이의 떠남을 아쉬워했습니다.
그것은 위축되었던 불교의 위상이 스님의 열반을 통해 다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든 문화적 배경으로 무조건적인 자비와 포용을 전제로 한 불교적 정서가 필요한 시대이기에, 많은 이들이 이 시대에 아주 적절한 방편으로 법문을 하고 계시다며 스님의 열반을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이 열반하신 이듬해에 저의 보잘것없는 재주가 스님의 존상을 제작할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전생에 그래도 지어놓은 복이 있었나 봅니다.
스님의 존상을 내 손으로 다듬어 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흥분이 욕심이 되어 생전의 스님보다 더 위엄 있고 멋있는 모습으로 완성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초상을 만들 경우 사진을 통해 그분의 모습을 만들게 됩니다. 정면과 측면의 사진만 있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상과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표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문도회로부터 받은 성철 스님의 자료는 이런 초상 조각을 만드는 데 충분했습니다. 전문사진작가들이 남겨놓은 사진집도 있었고 비디오 테이프로 생전에 기록해 놓은 모습들도 있어 스님의 모습을 재현해 내는데는 충분한 자료들이었습니다.
생전에 스님을 직접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의 자료라면 여태껏 해 왔던 다른 분들의 상像보다는 훨씬 훌륭한 초상 조각이 될 것임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작업에 들어간 후 일어난 일들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매일 새벽마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백팔배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작업을 한다고는 했습니다만,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 온통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해야겠다는 욕심, 훌륭한 스님의 모습을 완성시켜 칭찬 받아야겠다는 욕심, 다른 초상 조각들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는 욕심. 이런저런 욕심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욕심을 바탕으로 작업이 쉽게 풀릴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겝니다. 많은 자료와 생전에 가까이서 스님을 모셨던 분들의 자문을 받기까지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만족할 만한 스님의 상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작업 중 가끔 방문하시는 스님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받을 때마다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왜 이럴까. 여느 때 같으면 신통치 않은 자료를 가지고서도 만족스럽게 작업을 마칠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헤매는 것일까.
한동안 작업을 중지한 상태에서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명상을 통해 현재 자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욕심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긴 시간을 보낸 후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스님은 당신의 상을 만들어 세상에 우뚝하게 드러내 놓는 것을 싫어하실지도 모른다.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시며 중생들에게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랐던 스님이 어찌 자신의 번듯한 상을 내세우기 바라시겠는가. 분소의 한 벌이면 족하다며 걸레옷을 즐겨 입으시던 스님이 어찌 근엄한 모습으로 남기를 허락하시겠는가. 자신을 바로 보라고 모든 중생들에게 화두를 던지신 스님이 어찌 외관의 꾸밈을 미쁘게 생각하시겠는가.
또 다른 마음 한구석에선 스님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스님, 저희 같은 중생들에겐 스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저희들에겐 방편이 필요합니다. 대웅전의 부처님상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서는 신도들처럼, 저희들에겐 스님의 겉모습도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님, 고집 부리시지 말고 허락해 주세요. 이 세상에 스님의 법문 한 마디에 퍼뜩 대오견성大悟見性할 수 있는 근기의 중생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죽하면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위해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을 하셨겠습니까.
스님 좀 봐주세요. 제 욕심을 다 내려놓고 중생들을 위한 방편이라는 생각만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보고 나서였을까, 분명 작업진도는 예전과 달랐습니다. 스님들이나 여느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는지 몰라도, 처음 시작할 때 난감했던 때를 생각하면, 나로서는 제법 만족할 만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존상이 완성되어 백련암에 모셔진 후 나의 능력부족으로 아쉬움이야 있었습니다만 그나마 스님이 허락해 주셨기에 완성될 수 있었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련암 암자에 주장자를 짚고 앉아 계신 모습, 생가터 겁외사 광장 가운데 우뚝 서 계신 모습.
스님은 이 당신의 모습을 통해 다툼으로 뒤엉킨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내십니다. 온갖 오욕칠정으로 범벅이 된 중생들의 가슴을 향해 주장자를 내리치십니다.
스님 웬만하면 다시 돌아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