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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Reactionism)와 전환(Transformation)의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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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법진 2003년 10월 260호
성철스님 사리탑 지난 70~80년대 해인사를 살다간 스님이라면 성철 스님 얘기를 들으면 어느 자리에서의 대화건 간에 한마디쯤 끼어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러했다. 그러나 <월간해인>으로부터 성철 스님 열반 10주기를 기념하는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스님께서 생전에 큰절에 간간이 들르셨을 때 일어났던 에피소드 몇 개에 불과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의 자취를 하나하나 더듬어 보기로 했다.

해인사 입구에는 성철 스님의 사리탑이 장엄하게 모셔져 있다. 그 크기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전통적인 사리탑 양식을 뛰어넘는 파격에서도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사리탑이라면 적당한 크기의 석종형石鐘形이어야 하겠지만, 성철 스님의 사리탑은 흡사 맨하탄 빌딩 숲 적당한 공간에 조심스럽게 전시되어 있는 조각품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그 형식이 워낙 새로운 것이어서, 나처럼 오랜만에 해인사를 다시 찾은 이들에게는 충격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충격 때문에 낡은 당우로 들어찬 기억 속의 해인사와 새롭게 정비되고 단장된 지금의 도량 사이의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리탑을 처음 참배했을 때 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 불교와 사찰을 생각할 때마다 평소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싶어 내심 많이 반가웠다. 맨하탄에나 있을 법한 조각품을 이 깊은 산중에 가져다 놓았다고 하는 일종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꼈다.

파격적인 양식으로 사리탑을 조성한 것은 일종의 발전을 반영한다. 판에 박힌 것보다는 변화를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뿐 아니라 이는 스님께서 평생 동안 한국 불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으시려고 애쓰셨던 숭고한 정신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액면 그대로 보존하려는 태도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마땅히 수정해야 하거나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전통의 계승이라는 이름하에 그대로 전승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런 점에서 살아 생전이나 돌아가신 후나 스님의 이미지는 모두 어떤 것으로의 ‘전환(transformation)’이라고 하는 맥락에서 읽어야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생전의 이미지는 ‘몰록 깨달음과 몰록 닦음(돈오돈수)’이라는 원칙에 따라 한국 선종계를 바로잡으시고자 평생토록 애써 노력하신 점이 아무래도 가장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사실 지난 세기에는 ‘몰록 깨달음(頓悟)’이라고 하는 선종의 가르침이 중국 초기 선종의 핵심이었다고 하는 가설을 두고 많은 담론들이 오고갔다. 적어도 초기 선종에 관한 연구에는 《육조단경》의 ‘마음의 게송(心偈)’에 잘 나타나 있는 혜능의 몰록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북종 신수의 ‘점차적인 가르침(漸敎)’을 부정하고 혜능을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로 내세운 하택신회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리고 혜능의 선사상은 마조도일과 석두희천 그리고 임제의현 등 후대의 선종 조사들의 전통 속에 계속 이어졌다고 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주장인가 등 여러 가설들이 단골 메뉴로 등장했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자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담론들이 하나 둘 점차 부정되고 새로운 틀에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몰록 깨달음이나 돈점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선종만이 갖는 독특한 종교성이나 선종이 갑자기 흥기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존의 담론들이 설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스님께서는 《선문정로》를 통해 육조혜능에서 시작되어 마조도일, 임제의현, 황벽희운으로 이어지는 돈오돈수의 선사상이 선을 참구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의지해야 하는 바른 길임을 주장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혜능(638~713)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답해줄 만한 자료는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혜능의 가르침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혜능의 직계 제자 신회조차도 그의 저술 속에 혜능의 가르침을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 아마 신회로서도 혜능에 관한 어떤 기록 문서를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나 아니면 혜능의 제자들 모두는 자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 혜능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보면, 혜능의 가르침으로 전해지고 있는 《육조단경》도 신회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혜능이 중국 선종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역사적으로 선종의 발전에 어떤 구체적인 공헌을 했었는가에 대한 담론은 이처럼 매우 모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육조에 의한 몰록 깨달음의 가르침이 마조와 석두 그리고 후대의 선사들에 의해 계속 전해졌다고 하는 것도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만일 《단경》이 혜능의 사후에 우두종에 속한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타당한 것이라면, 마조와 석두 등으로 혜능의 가르침이 전해졌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고 만다. 게다가, 후대의 선종이 ‘북종’과 서로 배타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을 ‘남종’이라고 불렀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복잡하게 얽혀 있는 종파적인 꼬리표 때문에 북종, 남종, 그리고 우두종 등 초기의 선종 종파들과 마조도일에서 시작된 홍주종의 선풍 등 8~9세기 중국 선종계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초기 선종사를 명확히 밝혀줄 만한 1차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성철 스님께서는 《돈황본 육조단경》의 해석을 통해 혜능 선의 기본 정신인 돈오사상이 마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고 이해하였다. 이는 중국 초기 선종사에 있어서 신회와 마조의 선 사이에 분명한 사상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장의 이면에는 지역적인 고려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즉, 마조는 주로 남중국 변방에서 활동하면서 육조의 돈오사상을 올곧게 이어갔고 그리고 급기야는 그 지역에 홍주종 전통을 뿌리내렸던 반면, 낙양과 장안을 중심으로 활동한 신회는 북종선과 가까이 접하면서 북종의 선사상인 ‘점진적인 가르침(漸敎)’과 타협하여 혜능의 기본적인 선의 정신을 많이 훼손하였다고 믿었던 것이다.

지난 세기 중반에는 신회에 대한 연구가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신회가 혜능의 뒤를 이어 돈오사상을 널리 전하고 초기 남종선의 실제적인 토대를 만들었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호적(1891~1962)은 우연한 기회에 《돈황본 신회어록》을 보다가 이러한 가설에 대해 최초의 의문을 제기하였다. 호적이 보기에도 신회는 중국 선종사뿐만 아니라 지성사, 문화사에 걸쳐 커다란 전환점을 불러일으킨 뛰어난 개인임에 분명했다. 동시에 신회는 육조시대와 당대唐代의 불교 사상을 배척한 반면 전래의 중국적인 가치를 옹호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회의 선불교 전통은 ‘돈오점수’라는 이름으로 규봉종밀, 보조지눌로 이어졌다.

혜능의 선에 북종의 선사상을 받아들인 하택신회의 선사상 ‘돈오점수’는 규봉종밀과 보조지눌로 이어지면서 그 내용이 더욱 알차졌다. 당시까지 중국에서 논의되었던 불교의 여러 전통들을 돈오점수라고 하는 선불교 이론으로 통합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의 선에 대한 이해는 사상적인 발전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성철 스님이 보기에는 혜능의 돈오사상을 왜곡한 그릇된 선문의 길일 뿐이었다.

혹자는 성철 스님의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복고주의(Reactionism) 운동의 하나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철 스님이 제기한 바와 같이, 신회 이후에 새롭게 정형화된 돈오점수 이론에 따라 수행하는 것은 혜능의 돈오사상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라면, 응당 돈오점수로 왜곡되기 이전의 상태 즉 혜능의 선불교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외관상 복고주의적 선불교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이 선문의 바른 길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스님의 주장이 복고주의라고 평가받으면 어떻고 환원주의(Reductionism)면 또 어떤가.

스님께서 80년대 초 돈오돈수를 선문의 바른 길이라고 제기한지 십년쯤 지났을 때, 교계 일각에서 간화선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일어났던 적이 있다. 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라는 간화선 전통 내의 작은 이슈는 말할 나위도 없고, 간화선 그것 자체가 수행의 적절한 그리고 유일한 대안인가에 대한 재검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근자에 들리는 바로는 비파사나 수행이 간화선 수행을 대체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대안이라는 제안까지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변화를 기대하는 대중적인 정서를 반영하는 것들이어서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성철 스님께서 이러한 변화의 몸부림을 직접 목격하셨다면 어떤 식의 반응을 보이실까. 그것은 선문의 길을 찾아가는 이들의 발전적인 고민일까 아니면 또 다른 복고일까.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