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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의 힘과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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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서재영 2003년 10월 260호
필자가 처음 접한 백일법문은 책이 아니라 스님의 육성 테이프였다. 법문 하면 으레 영험담이나 신화적 내용이겠거니 했던 필자는 백일법문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띄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는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온 나라를 휩쓸고, 과학 기술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던 때였다. 이런 분위기에 물든 탓에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물질문명과 과학적인 것, 또는 서구적인 것이 진보이며 아름답고 윤택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백일법문을 처음 접했던 10대 후반의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일법문은 과학적 사실만을 맹신하며 이성적 오만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적절한 소재를 담고 있었다. 스님의 법문에는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불변의 법칙과 같은 내용이 등장했고, 이것을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원리와 접목해 설명했다. 부처님께서 전의설법轉意說法을 하셨듯이 스님은 과학적 사실을 설법의 방편으로 활용하고 계셨다. 그제서야 스님의 법문이 뉴스에 오르내리고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모으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온통 서구적인 것, 과학적인 것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던 중생들의 마음을 스님은 읽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필자가 스님의 법문을 육성이 아닌 책으로 만났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스님의 육성법문은 책이 줄 수 없는 힘과 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의 목소리에는 신심에서 묻어나는 힘이 느껴졌으며, 청중들과 호흡을 함께 나누는 생생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의도적으로 기획되고, 논리적 문장으로 서술된 책과는 느낌이 달랐다.
경상도 사투리 하면 왠지 촌스럽고 고상한 진리나 주류문화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생각하던 필자에게 스님의 강한 억양은 진리는 서울말로만 설해지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했다. 그 이후 성철 스님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달라졌고 더불어 불교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매일 독송하지만 그 가치를 몰랐던 《반야심경》이 새롭게 다가왔고, 내가 《반야심경》을 독송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이제 스님의 법문은 《백일법문》이라는 잘 다듬어진 책으로도 만날 수 있다. 스님 생시에 제자들의 노력으로 육성법문을 정리해서 법문집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백일법문》을 읽으며 개발과 성장, 서구적 가치의 언저리에 개인의 행복과 인류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 젊은이들과 함께 스님의 가르침을 공감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에 동국대에서 맡았던 교양과목의 교재로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채택했다.
물론 이것은 많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백일법문이란 대선지식께서 눈 밝은 납자들을 향해 내리신 법문이 아니던가. 그것도 무려 100일이라는 근대 한국불교사에서 보기 드문 대작 불사를 통해 탄생한 장광설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내게는 스님이 풍기시던 그 강렬한 확신과 힘이 넘쳐나는 경상도 억양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을 수행으로 일관하신 수행의 힘이 절대 빈곤한 중생이 아니던가. 하지만 내가 느꼈던 감동과 법문 중간 중간에 “우리도 한 번 해 봅시다!”라는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그리고 한장 한장 《백일법문》을 읽고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시 신심과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스님의 법문은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좋았다. 학생들의 반응도 내가 그랬듯이 불교가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종교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 심지어 타종교를 믿는다던 한 학생은 강좌가 끝난 다음 다시 자기 신앙으로 돌아가기 부끄러울 만큼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만약 그 학생이 성철 스님으로부터 백일법문을 직접 들었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출가를 결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새삼 백일법문의 힘을 다시 깨달았다.
신라에는 원효 스님이 계시고, 고려시대에는 지눌 스님이 계시며, 조선시대에는 서산 스님이 계시지만 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할 만한 스님의 저서를 들라면 무엇을 들 것인가? 이 수업을 마치면서 나는 그것이 바로 《백일법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백일법문》에는 원효나 지눌이나 서산 스님이 따라오지 못할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글로 씌어진 법문집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구어체로 대중들을 향해 구수한 억양으로, 문화적 변방을 상징하는 사투리로 설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백일법문은 대중들을 위한 설법이다. 선종의 대표적 어록이라고 할 육조단경 역시 혜능 스님의 육성법문을 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철 스님께서 강조하시던 조계 정맥의 전통은 《백일법문》과 《육조단경》의 설법 형식에서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끝으로 백일법문은 선사의 설법이다. 이 말은 문자의 메시지를 통해 성철 스님의 뜻을 모두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백일법문》의 진짜 의미는 언어적 설명의 이면이나 책의 여백에 있을지도 모른다. 알맹이는 문자에 있지 않고 문자는 그 알맹이를 지시하는 이정표 역할만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백일법문》은 성철 스님께서 후학들을 위한 자비심으로 남기신 자상한 이정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표를 보고 그것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참다운 도道의 길로 들어오라는 것이 《백일법문》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의미일 것이다. 이제 그 이정표를 유심히 읽자. 그리고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실제로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기자. 그것이 백일법문을 성철스님의 가르침대로 읽는 독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