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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정로》와 돈오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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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윤원철 2003년 10월 260호
성철性徹 스님의 법문 《선문정로禪門正路》가 책으로 출판된 지 올해로 만 22년이 되었다. 스님 생전에 《본지풍광本地風光》과 함께 이 《선문정로》로써 부처님께 밥값을 했다고 자부했을 만큼 스스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 법문이다. 이 법문을 계기로 해서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인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벌어졌다.
잘 알려졌다시피,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禪의 올바른 수증修證이고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은 선의 이단異端 수증론이라고 역설하는 것이 그 법문의 핵심이다. 돈오돈수, 즉 깨침도 “몰록 깨침”일 뿐 아니라 닦음도 깨침과 함께 “단박에 다 닦아 마친다”고 하는 이 개념조합은 선종의 교과서인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이미 등장하고 규봉종밀圭峰宗密도 선의 여러 가지 수증修證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였다. 거기에서는 근기根機가 높은 이들의 수증법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두고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선택할 문제로 보지 않는다. 적어도 선수증에 관한 한, 돈오점수는 애초에 전적으로 틀린 것이고 오직 돈오돈수여야 옳다고 한다. 하지만 돈오돈수라는 개념은 닦아서 깨친다는 데 대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한다. 닦는 것은 이 세상 속의 그 어떤 인간 활동이나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요, 깨침은 그 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이기 때문이다. 돈오돈수는 언제라도 한 소식이 툭 터질 태세인, 그야말로 말 한 마디만 제대로 만나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가 터져 나올 태세인 이른바 최상승기最上根機라면 모를까 보통 수행자들에게는 보편성과 현실성이 없지 않느냐는 비판이 돈점논쟁 중에도 많이 나왔다.
상식적으로 볼 때 분명히 현실성과 보편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수증론을 성철 스님이 그토록 힘주어 내세웠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설을 들고 나온 의도는 선수증론 그 자체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데 있기보다는 다른 데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를테면 하택종荷澤宗과 지눌知訥 스님의 정통성正統性을 부인하는 데라든가, 또는 깨침과 닦음과는 관계없는 경력에 불자들의 관심이 기울고 그런 경력만으로도 선승禪僧의 권위가 보장되는 세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데 성철 스님의 주된 관심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제시한 수증론의 일관성이나 현실적인 유용성 따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은 선수증론으로서의 의의보다는 다른 방면의 의미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 방면의 의의도 분명히 있고 본격적으로 논의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과연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설은 하나의 일관된 선수증론으로 성립할 만한 구성과 체계를 결여하고 있으며, 다만 뭔가 다른 주장을 펴기 위해서 선수증론으로 포장되어 제시된 모순된 명제들의 조합일 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수증론으로서의 돈오돈수론이 갖추고 있는 체계에 대해서는 졸고 “선문정로의 수증론”(《백련불교논집》 4, 1994)에서 논의한 바 있어, 여기에서 다시 논하지는 않겠다.
돈오돈수론에 대한 이해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대개 그 주요 개념들을 불교 일반, 또 특히 선의 문맥보다는 엉뚱한 다른 문맥에 갖다놓고, 즉 세간의 상식을 적용해서 보는 탓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돈오니 돈수니 하는 개념은 시간이라는 틀을 적용해서 이해하려고 할 일이 아니다. 세간의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시간과 공간을 기본적인 틀로 해서 세계관, 존재론, 인식론, 가치관 등을 세워놓고 있다. 그러나 시공간의 틀 너머까지 의식과 경험을 확장하여 거기에서 궁극적인 실재,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교, 도교 등 이른바 고전종교의 공통된 기본적인 특징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개념인 무아無我, 무상無常, 나아가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 개념인 공空 등은 모두 그런 세간의 틀을 넘어서 실제實際를 보라는 메시지이다.
선종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을 분별分別이라 하는 것도 바로 세간의 틀에 얽매어 있는 의식을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종의 종지를 표현하는 구호로 흔히 사용되는 무념무심無念無心이라는 말은 망령된 생각과 마음이 없는 것을 가리키고, 망령된 생각과 마음이란 곧 분별하는 생각과 마음이라고 설명되곤 한다. 여기에서 분별이란 해와 달, 낮과 밤, 남과 여, 찬 것과 뜨거운 것 등 삼라만상의 물리적인 개체와 현상에다가 대법對法의 틀을 적용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개별자로만 보는 사고의 근본적인 틀을 말한다. 이것은 사실상 모든 존재가 생겨날 때부터 이미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를테면 존재의 근본조건이다. 이미 물리적으로 개별자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는 의식과 존재양태를 타고난 것이다.
불교는 그처럼 개별자로서의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근본조건에 얽매인 의식을 풀어버리고 법계法界, 즉 세상 전체, 우주 전체를 제 몸으로 하는 연기적緣起的 존재로서의 자신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선종에서는 연기적인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이 바로 부처라고 하면서, 그것을 찾거나 그렇게 되려고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원래 그런 정체임을 알아차리면 된다고 강조한다.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로서의 성품이 있다’ 하는 불성佛性 개념, 나아가 모든 중생이 본래 깨쳐 있다는 본각本覺의 교리개념을 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그 극단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선종의 돈오 교의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 일반의 맥락에서도 별 무리 없이 정합성을 가지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문제는 돈수라는 개념이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시간이라는 틀을 악착같이 붙들고 놓아버리지 못한 채 이 개념을 대하기 때문이다. 시간상으로 단박에 닦아 마친다는 그 어감에 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이러한 수행을 하면 깨침이라는 결과를 향해 나아가리라는 기대는 인과율이라는 우리 사고방식의 또 하나 근본적인 틀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선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 또한 분별망상의 하나일 뿐이다. 깨침은 분별망상이라 총칭되는 모든 중생적인(여기서 ‘중생’은 편의상 ‘부처’의 반대말로 썼다) 틀을 깨버리는 것이지 그 틀 속의 어떤 것이 아니다. 깨침이란 그 틀을 활용해서 그 결과로 이룩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그 틀을 깨버리는 것 그 자체가 깨침이다. 무소의無所依, 즉 그 어떤 중생적인 틀이나 장치도 깨침을 위해서는 의지할 바 없다는 선종의 교의가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수행이라고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것은 실상은 다 그 중생적인 틀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빚어지려니 하는 분별의 의식으로 고안된 것이다. 돈수란 그러니까 수행의 과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단박에 수행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뜻도 아니며, 중생적인 틀에 의지하여 깨침을 기대하는 잘못된 소의所依 및 대오待悟를 부인하는 뜻이라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단박에 닦는다는 수행법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냐, 그런 수행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으로서의 수행 개념만을 가지고 돈수의 “수修”를 풀이하려는 습성 때문이다.
그러니까, 돈수는 어떤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공안참구이다.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가 시공간의 틀 속에서 행하여질 수밖에 없으며 공안참구도 마찬가지이다. 공안참구는 시공간의 틀 속에서 사는 우리가 시공간의 틀을 넘어서는 무념무심의 상태를 이룩하는 첩경의 수행방법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념무심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생각과 마음을 비우거나 없애려고 해보았자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목석에나 해당되는 일이지 생명체로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 대신에 생각과 마음의 자리, 즉 세상 전체를 의심덩어리로 가득 채워 터뜨리는 방법이 공안참구이다. 대승불교에서 세운 보살도菩薩道 이념은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소극적인 방법에서 더 나아가 수행의 에너지를 서원誓願 달성이라는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공안참구도 멸진을 위해 오히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한다는 그러한 성격의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