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성철 스님의 선종사적 의미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종묵 2003년 10월 260호
우리 삶의 많은 역정에서 무엇이 한 인간에게 가장 깊은 감동과 인상을 남기는 것일까? 인간에게 늘 그리움을 품게 하는 삶의 궁극적 가치는 무엇일까? 자유, 진리, 기쁨, 행복, 아름다움, 사랑, 멋, 생명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의 궁극적 추구일 것이리라. 우리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이런 궁극적 가치와 매우 유사한 것들을 만나 환희에 젖기도 한다.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가치들의 원형과 조우하기도 한다. 이런 만남은 한 인간의 일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만남으로 인해 그의 상황을 견디게 하고 극복케 한다. 이런 궁극적 가치들이 한 인간 내부에서 함께 어우러져 육화肉化될 수 있다면, 그런 인격이 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82년 윤사월의 오후, 백련암에서 철 스님(70~80년대의 대부분의 수좌 스님들은 성철 스님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스님에 대한 존경과 친근감을 표시했다.)과 온 몸으로 만난 뒤, 내면으로부터 떠올라 온 느낌은 그냥 멋있는 노인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대중으로부터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면서 새벽예불 빠지고 잠자다가 갑작스런 스님의 내방에 혼비백산 놀라 꽁지빠지게 도망치던 학인의 뒤를 쫓아 고함치던 엄격함은 아니었다. 법상에서 그 당시 자주 말씀하시던 ‘돈오돈수’ ‘돈오점수’ ‘확철대오’ ‘돈황본 육조단경’ ‘동정일여’ ‘오매일여’ ‘숙면일여’와 ‘등가원리’ ‘에너지 불변의 법칙’ 등 생경스러웠던 언어와 현대물리학의 용어와 공식들로 무장된 모습도 아니었다. 난 스님을 그냥 멋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 한참을 내 내부에서 구체화된 스님의 이 ‘멋’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멋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체득되는 것일까 등등. 멋의 사전적 의미는 ‘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움’ 또는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론 적절치 않았다. 얼마 후에 내가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멋이란 한 사람 내부에서 극단적인 두 가지 요소, 예를 들면 선과 악, 미와 추 등이 잘 조화되어 상황에 따라 그 극단적인 두 가지 요소를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쓰는 태도이다. 아마 ‘선禪이란 멋이다, 멋이란 깨달음이다’라고 단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스님은 멋있는 인간이었다.
스님이 가신 지 어언 10년. 그 동안 해인사와 종단에는 참으로 많은 내홍이 있었다. 70~80년대를 해인사에서 살았던 많은 이들에게 스님은 친근하고 엄격함의 대명사였고, 존경의 대상이었고 법의 표상이었다. 이제 스님은 점차 그리움과 전설과 신화의 영역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스님이 한국불교 특히 선종사에 남긴 역사적 의미를 천착해 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출가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스님의 법상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내려 뇌리에 꽂혔던 ‘돈오돈수’ ‘돈황본 육조단경’ ‘확철대오’ 등의 어휘는 아직도 내 일상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10년 가깝게 《육조단경》을 축으로 동아시아의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스님이 갖는 선종사적 의미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80년 10월 27일 법난 이후 종단 안팎은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다.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급기야 젊은 스님네들까지 참여하므로써 수행자 내부에서 참여, 비판, 관망, 무관심 등 다양한 태도와 의견이 분분했다. 법난 직후 종단을 추스르기 위한 움직임이 조계종불교중흥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마침내 원로회의는 1981년 1월 10일 성철 스님을 7대 종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스님의 법어는 그 이전의 법어와 그 궤軌가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수행자의 삶과 수행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방향 제시였다. 불공의 진정한 의미를 역설하였고, ‘돈오돈수’가 선문의 바른 길임을 천양하였다. 그 근거를 《돈황본 육조단경》을 통해 제창하였다. 아울러 하택신회(684~758), 규봉종밀(780~841), 보조지눌(1158~1210)의 ‘돈오점수’설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지금까지 한국불교 소의경전의 대부분이 규봉종밀의 ‘돈오점수’ ‘교선일치’의 텍스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종밀은 신회를 애써 천양하였고 지눌은 종밀의 주석가이기도 했다. 드디어 스님은 수백년 내려오던 소의경전 중 돈오점수의 텍스트인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와 지눌 스님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해인승가대학의 사집과정의 교재에서 빼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돈오돈수의 텍스트로 가장 빠른 《돈황본 육조단경》과 대주회해의 《돈오입도요문론》을 넣도록 하였다. 이로서 사집과정은 당, 송, 원대의 돈오돈수 택스트로 확연히 정리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님은 참으로 엄청난 결단을 한 것이었다. 교가敎家의 천태, 화엄에서 여러 가지 교판이 있었지만, 선가禪家에서 스님처럼 돈오돈수의 사상적 결단을 통해 수백년 내려오던 소의경전의 텍스트를 바꾼 선판禪判(교판敎判의 대어對語)을 한 것은 한국 선종사상 처음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스님의 선판은 마침내 교계 안팎에 돈점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돈점논쟁은 한국정신사에도 대단히 의미 깊은 사상논쟁으로 기억된다. 이런 기류는 분별을 극히 꺼리는 수좌스님들 내부에서도 돈점에 대한 태도가 더욱 명확해져 갔다.
또 스님이 방장으로 계신 80년을 전후해 매 결제철마다 한 소식 했다는 스님, 깨쳤다는 스님들이 백련암에서, 상당법어의 법석에서 법거량이 심심치 않게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수행분위기에 대해 스님은 자기점검의 틀과 깨달음의 전거를 분명히 제시했다. 화두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고’ ‘오매寤寐에도 일여하고’ ‘잠이 꽉 들었을 숙면에도 일여’하여, ‘제8아뢰야식의 미세망상까지 사라져 내외명철해야 확철대오이다’ 한 것이 그것이다. 중국의 임제의현(?~867)의 3현玄, 3구句, 4빈주賓主, 4료간料簡 등 가르침을 펴는 방법이 체계화된 이후, 운문삼구雲門三句, 조동군신오위曹洞君臣五位, 황룡삼관黃龍三關 등과 일본임제종의 중흥조 하꾸인(白隱) 선사(1685~1768)의 오위五位 등, 수행의 혼란이 있을 때, 뛰어난 선승들은 자기 점검의 틀 내지는 가르침을 펴는 방법을 정립, 그 시대의 수행풍토를 쇄신시켰다. 정말로 ‘동정일여’ ‘오매일여’ ‘숙면일여’는 동아시아 선사상사 속에서 ‘성철삼관性徹三關’으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스님은 동아시아 선종사의 또 하나의 새로운 우뚝한 봉우리이며 한국선불교의 중흥조임에 틀림없다. 한국선불교의 중흥과 천양은 스님이 마지막으로 주석했던 해인사의 말석에서 스님의 꾸중과 가르침을 받았던 우리들에게 스님이 남기신 마지막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