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두류공원 한 귀퉁이에 있는 금각사엔 그 흔한 일주문도 없다. 자그마한 법당 하나와 허름한 요사채가 전부다. 객을 맞을 만한 마땅한 방도 없는 듯, 스님은 기자 일행을 법당으로 안내하면서 그랬다. “내 방은 비가 새서 지금 수리중이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씀하는 것이, 누더기 가사 한 벌 남기고 돌아가신 스승을 십수 년 모셨던 상좌답다. 미숫가루 한 잔을 앞에 두고 비로소 스님과 마주하니, 부처님 앞에 앉아 있는 스님의 얼굴이 법당 금빛 부처님의 모습만큼이나 환하다. 스님의 눈매가 스승이신 성철 스님과 닮았다.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당치도 않다는 듯 ‘아이구…’ 하면서 조금 소리내어 웃는 모습이 예순을 넘긴 분 같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해 보인다. ‘생의 마지막 순간,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단 한 분의 선생님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기준한다면 성철 스님의 세 번째 상좌인 만수 스님은 진정 행복한 분이다. 스님은 열다섯에 산문에 들어와 예순을 넘긴 지금까지의 한 생을 돌아보면서 거의 대부분을 스승의 이야기로 대신했다. ‘스님 이야기 좀 하시지요.’ 하면서 말머리를 돌려보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스님의 스승에 대한 회고의 시간은, 곧 스승 곁에서 스승의 삶을 보고 듣고 깨우쳤던 자신의 삶 그 자체였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었으리라.반드시 해야 할 것만 행하라
“돌아보건대 세월이 45년이 더 흘렀습니다.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 아직 미흡한 게 많아요.” 그렇게 말문을 연, 스님의 쉰 해 가까운 출가의 길은 스승을 시봉했던, 사미계를 받기까지의 십년 세월에 집약된다. 그 시기는 훗날 스승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방장으로 추대되어 중도사상으로 선禪과 교敎를 꿰뚫어서 설명한 불교를 《백일 법문》으로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다. 불심이 돈독했던 부모님이 ‘절에 가서 살아보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의에 ‘그 길이 내가 살 길인가 싶어’ 두말 않고 성전암으로 간 것이 1956년, 열다섯일 때였다. 그곳에 가니 걸출한 ‘도인’ 한 분과 스님 또래의 두 명의 행자가 살고 있었다. ‘꼭 공부해서 저 분처럼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그리고 꼭 아버지 같기도 한 스승 곁에서 부모님도 잊은 채 십 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책이 가득한 장경각에 한 번 들어가면 서너 시간씩 꼼짝하지 않았고, 어린 상좌들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손수 목탁을 잡고 예불을 하고 대참회와 능엄주를 했던 스승 곁에서 스님은 출가의 길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세월을 보낸 것이다.
성전암을 완전히 뜯어내다시피 수리하고 들어앉은 스승은 철조망을 두르고 은거하면서 가끔씩 찾아오는 청담·자운·향곡 스님 등 몇 분말고는 다른 일반인들은 일절 만나지 않았다. 가끔 들러 살림살이를 꼼꼼히 보아주면서 성철 스님께 공부를 점검받았던 지금 해인사 방장 법전 스님말고는 누구도 출입하지 못했다. 결제와 해제, 그리고 명절 때만 이틀에 한해서 문을 열였던 그곳에서 스님은 먼저 와 있던 천제 스님과 공양주와 채공을 반 년마다 번갈아 맡아하면서 절집생활을 익혔다. 나무를 하루에 꼭 한 짐씩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제법 큰 채소밭에 씨를 뿌리고 밭 매고 거둬들였다. 나무를 팰 때는 스승도 나와서 손수 도끼질을 하곤 했다. 신도들이 시주한 쌀 한 톨을 허투루 했다가는, 공양시간에 ‘아무개는 들어오지 마라’ 하던 스승 곁에 살면서 유가의 사서四書를 다 외웠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기 위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힌 뒤에 《금강경》 《법화경》 《관무량수경》 《육조단경》 등을 익히고 외웠다. 《논어》를 다 외운 어느 날, 이만하면 완벽하게 외웠다 싶어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점검을 받던 어느 날, 스승이 《논어》의 어느 한 곳을 짚으면서 물었다.
“자왈子曰, ‘가이행이행可以行而行하며 불가행이불행不可行而不行’, 이걸 풀이해 봐라.” 하셨다. 스님은 글자 그대로 새겼다. “가히 행할 만하면 행하고 행하지 못할 것 같으면 행하지 않는다, 그런 뜻입니다.”
‘좀더 분명히 대답하라’고 하던 스승이 조금 있다가 일렀다.
“그렇게 하면 안 돼. 반드시 행할 것만 행하고 안해도 될 것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 당시는 그냥 지났는데, 살아가면서 보니까 스승이 살아온 것도 그렇고, 실생활에서 보니까 수행자가 꼭 해야 하고 새겨야 할 가르침이었다고 스님은 회고한다. 성전암에 철조망을 둘렀던 일이나 부모님의 부고를 받고서도 상좌를 보냈을 뿐 찾지 않았던 스승의 행을 보며 스님은 스승의 가르침을 읽었다. ‘출가의 길에 있어서 안해도 될 것은 절대 하지 말라’는 그 가르침은 뼛속에 각인되어 평생 수행자의 길에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9년 만에 성전암을 떠나 김용사에서 스승을 한 해 더 시봉한 다음, 스님은 성철 스님을 은사로, 종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리고 비로소 스승에게 ‘조주 무자’ 화두를 받고 제방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백련암에서 삼 년 더 스승을 모신 후 바람처럼 다니며 공부를 하다가 이곳 금각사에 둥지를 튼 것이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가끔씩 들러 스승을 뵈면, ‘공부는 잘 하나? 열심히 하거라’ 하시던 스승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생명의 존엄성은 자기를 바로 보는 것
“스님은 언제 공부를 가장 ‘되게’ 하셨습니까?”
한 번쯤 목숨을 내놓고 공부했었을 시기를 물었는데, 스님의 대답이 평범한 질문을 뛰어넘는다.
“말하고 있는 지금입니다. 지금 이 순간 코끝을 보고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하지 않아도 되고 미뤄도 되지만, 숨쉬는 것은 그럴 수 없죠. 이 일이 제일 진실이에요.”
스님은 ‘숨만 부지런히 쉽니다’ 하면서 웃는다. 밖에서 들리는 새 울음소리만큼이나 평화로운, 그리고 진실한 웃음이다. 워낙 태산처럼 우뚝했던 스승의 존재였던지라 가슴에 각인된 가르침도 남달랐을 것 같다.
“화두 참구해서 오직 자기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오직 살길이라는 그것 하나였어요.”
오늘날, 인간은 얼마나 많은 오류로 인해 자신의 존엄성을 팽개쳐왔던가. 순간,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주제가 서늘하게 가슴으로 들어왔다.
“스님이 체험한 참선이란 무엇일까요?”
“자기 생명을 찾는 과정이죠. 결국은 생명의 존엄성을 깨우치는 과정이에요.”
“생명의 존엄성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죠.”
그러면서 스님은 ‘참선은 이렇게 얘기하면서 밝아 있는 것이다’란 말을 덧붙였다.
“참선공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기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모든 사물을 대하는 것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스님의 답은 언제나 길지 않다. 진지하되 간결하다. 도의 길도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주제 하나만 정성스레 밀고 나가면서 삶의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스님의 간결한 답변이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열다섯에 산문에 들어와 지금 예순셋을 넘겼으니, 어느덧 오십여 년이 가까워오는 세월이다. 그 길을 바라보는 감회는 어떠할까.
“<법성게>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있죠. 처음 마음을 낼 때 바로 도를 깨친다는 말인데, 지금도 그 심정입니다. 땅이 천 번, 만 번 바뀌어도, 어디 가도 이 생각 이대로지 다른 것 없어요.”
그러면서 스님은, ‘살아오면서 아쉬움이 왜 없었으랴만은, 나름대로 잘 왔다 싶고, 다시 태어나 무엇을 하더라도 이 길뿐이다 싶다’고 했다. 자신이 지나온 삶에서 ‘이 길이다’ 싶으려면 자신의 생에 얼마나 많은 헌신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인가.
“우리 스님 생전에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 물을 것도 다 묻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나니 그게 가장 아쉬워요.”
스님의 눈빛에 금새 스승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다.
“부처님 같은 분이었어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신 분이고 세속을 초월해서 사신 분이죠. 귀에서 나는 소리(耳鳴)는 자신밖에 듣지 못하듯, 양심에 따라 공부하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어린 상좌들에게 왜 그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는지 알겠어요..”
성전암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 어느 날 상좌 몇을 앉혀 놓고 스승이 물었다.
“세상에 모양과 글자가 가장 다른 게 무어냐?”
어린 상좌들의 이런저런 답을 듣고 나서 스승이 이렇게 일렀다.
“해(日)다. 왜냐하면 해의 모양은 둥근데 글자는 모가 나지 않았니?”
그 자리에선 이해하지 못했으나, 스님은 늘 그 말씀의 진의를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언어로써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잖아요? 공부하는 방법이나 내용을 여실히 표현할 수 없으니까 답답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언어도단,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공부해서 너희들이 밝혀라 하는 얘기를 그렇게 간접적으로 얘기하신 거죠.”
인터뷰가 끝나니 어느덧 두 시가 넘어 있었다. 공양주보살님이 차려준 점심공양을 하고 스님을 찾으니, 따로 죽을 드시고 난 스님이 어느새 법당에 앉아 턱을 괴고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
“스님께서 열반하시기 사흘 전이었어요. 스님께서 위독하시다고 연락이 와서 상좌들 모두 해인사에 모였죠. 저녁에 모두 절을 하고 나서 서 있으니까, 기력이 없으시면서도 나를 부르셨어요. 만수야, 하는 눈으로 손짓하여 유독 나를 부르셨어요. 내가 다가가니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탁 퉁기셨어요. 제가 그래서 ‘제가 제일 만만하십니까?’ 했죠.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셨어요. 그때 스님의 뜻을 절실히 느꼈어요. 더할 영광이 없지요.”
스님은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를 스승께 삼배를 올리고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스님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는 듯 느껴진다. 스님의 무소유적 살림살이를 대변하듯 금각사 앞마당의 작은 화단엔 빨갛게 열매를 맺고 있는 해당화 한 그루, 채송화, 봉숭아 몇 그루가 전부다. 그러나 하늘 높이 쭉 뻗은 측백나무 세 그루는 스님의 성품을 드러내듯 반듯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
“숨쉬는 것이 진실이죠. 나는 코끝을 보며 매순간 눈떠 있어요.”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화두처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