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곡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이 멱살잡이를 하다
편집실에서 성철 큰스님 열반 10주기 특집을 꾸민다는 전갈이 왔다. 초심시절에 큰스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살았던 인연으로 감회가 유별나지 않을 수 없다. 총림이 결성되던 첫 해 백일법문을 시작한 때라 큰스님께서는 큰절 퇴설당에 주석하시면서 매일 백련암을 오르내리셨다. 그럴 때면 나는 두세 걸음 뒤에서 큰스님을 시봉하고 다녔다. 그 한 해 동안 큰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로 곁에서 몸으로 느끼면서 지낼 수 있었던 나는 대단한 행운아였다.
그해 큰방에서 발우를 펴는 대중만 400여 명이 넘었다. 그 큰 대중이 매일 큰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여법한 생활을 했으니 참으로 장엄한 총림회상이었다.
“많이 먹지 말라. 중이 밥을 많이 먹으면 도둑놈이다. 잠을 많이 자지 말라. 잠자는 것은 죽는 연습 하는 것이다. 잠든 시간은 송장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중이 남의 일 다 간섭하고 언제 공부하노? 말 많은 수좌는 거짓말쟁이며 도둑놈이다. 돌아다니지 말거라. 참선한다는 놈이 돌아다닐 여가가 어디 있노? 돌아댕기면서 참선한다는 놈은 말짱 거짓말쟁이다. 책 보지 말거라. 화두 챙긴다는 놈이 남의 책이나 읽는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오직 화두만 챙겨야 한다. 설사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남의 글을 읽는 것은 화두에 방해가 된다. 적어도 한 삼년은 책을 보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독서금지의 지침은 책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나 화두를 챙기는 선방의 수좌들에게 주신 말씀이 분명하다. 당신의 상좌들에게는 삼년 이내에 일본어 마스터와 기본교서 섭렵을 당부하셨다.
스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해 여름 향곡 스님과 법거량하시던 사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향곡 스님은 체격이 엄청 크신 데다 풀 먹인 모시 장삼을 입으셨으니 그 풍모가 대단했다. 성철 스님 역시 작은 체구가 아니셨으며 게다가 두 분의 목소리는 추호도 머뭇거림 없이 호호탕탕하여 대장부의 기상이 철철 넘치셨다. 해인사가 비좁은 느낌이었다.
향곡 스님은 당신의 상좌인 월내月內 묘관음사 주지스님과 몇 분의 시자를 거느리고 오셨다. 해인사에서는 천제 스님과 보성 스님 그리고 지금은 재가불자가 된 원기·원공 스님이 배석하셨다. 당대의 선지식 두 분이 제자들과 함께 양편으로 갈라 앉으시니 관음전에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대중들의 수인사가 끝나자 두 분께서는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으며 문답(법거래)을 시작했다. 그런데 몇 차례 말씀이 오가기도 전에 갑자기 두 분이 서로 멱살을 거머쥐고 밀고 당기며 “일러라!”고 고함을 치셨다.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힐 듯했지만 지켜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때 원공·원기 스님이 나서며 뜯어 말리려 했다. 그러나 두 분은 동시에 “이놈아 이럴 때는 너희가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호통을 치셨고, 그 싸움(?)은 잠시 더 계속되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전(?)을 마친 두 분은 서로 손을 맞잡고 한동안 통쾌하게 웃으시며 서로를 칭찬하셨다.
선지식들이 자신의 수행 경지를 피력할 때는 싸움만이 아니라 목숨마저도 서슴없이 내거는 확신에 찬 행동을 보인다. 법거래의 상대와 의기가 상통하지 않으면 손을 털고 일어날지언정 적당히 얼버무리는 법이 없다. 요즈음은 그처럼 칼날 같은 기상으로 법거량을 보여주는 선지식을 만나기 쉽지 않다.
커다란 눈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의 달마도
글씨는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림은 그 사람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품성을 알 수 있고,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있다. 선화는 삼매에 들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도달한 수행의 경지를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때문에 선화는 다른 어떤 그림보다 구도나 운필에 있어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반도에서는 8세기 이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수많은 선종사찰들이 생겨났다. 활발했던 선종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한국에도 훌륭한 선화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은 많은 불화들이 국내외에 보존 전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조선시대 이전의 선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선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명국(1600~?)의 달마도를 소개한다. 그의 호는 연담蓮潭이며 술을 즐겨 스스로를 취옹醉翁이라 할 만큼 말술로 대취한 채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또한 사람됨이 호방하여 세밀하기보다 거친 듯 대담했다. 출가 수행자는 아니었지만 도사道士나 선사들을 즐겨 그렸으며,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호쾌한 달마도를 남겼다. 그런 점에서 그를 한국의 대표적 선화가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반신 달마도는 달마가 갖고 있는 선적 이미지를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커다란 눈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는 이 그림의 핵심적 표현요소로서, 학식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직관하는 선수행자의 정신세계를 적요摘要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은 야생마의 갈기를 모아 만든 억세고 거친 산마필山馬筆을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굵고 힘차게 휘두르는 그의 운필은 선수행자가 자신의 확고부동한 신념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활발발活潑潑한 기상을 연상시킨다. 또한 마치 산자락을 내달리는 야생마의 갈기처럼 찌를 듯이 예리하게 갈라지며 파고드는 선線은 법거량을 주고받는 선사의 확신에 찬 할喝 소리마냥 폐부를 찌를 듯하다. 그런데, 아래로 처진 눈썹과 머리까지 감싼 긴 옷은 빳빳한 수염과 치뜬 눈의 위압감을 지그시 눌러주는 자비를 함축하는 것일까? 오래 바라볼수록 강렬함과 부드러움의 절묘한 조화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