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은 나를 압도하였고 안광은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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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윤장수
2003년 10월 260호
성철 스님과 나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삼십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니 큰스님의 열반으로 부터는 이십년 전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나와 큰스님과의 인연은 이십년이란 긴 세월인 것이다.
당시 나는 K은행 울산지점장으로 있으면서 그렇게 여유있는 시간은 없었지만 근처에 있는 비구니스님들의 수도장인 석남사를 드나들며 불심을 키웠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곳 주지스님도 알게 되었다. 그 인연도 날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해인사 백련암에 기거하시던 큰스님의 성화를 듣게 되었고 가야산 호랑이요 도사스님으로 속칭되었던 큰스님을 친견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게 되어 이곳 주지스님을 졸라 성철 큰스님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무지에서 나온 나의 무례함과 당돌하였던 점을 열반하신 지 오래 된 인홍 주지스님께 지금이나마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1974년 음력 정월 스무날께 인홍 스님의 인도로 드디어 해인사 백련암을 찾은 것이다. 해인사에서 백련암까지 두렵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오르는 산길은 더욱 숨 가빠졌고 절문 앞에 다가서는 순간 다가오는 중압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천배라는 큰 과제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큰스님을 친견하려면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인식이었기 때문이다.
불안 초조한 마음으로 큰스님을 처음 뵙는 순간 그 위풍은 나를 압도하였고 안광은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런저런 말씀 끝에 아니나 다를까 “니 절 좀 해볼래? 절돈 삼천원만 내라. 삼천원 내몬 미기주고 재워주능기라. 내가 말하는 절돈은 진짜 돈이 아이고 절 한분에 일원씩 쳐서 절 삼천분 하몬 그기 절돈 삼천원잉기라. 니 알겠나? 할 수 있겠재?” 하시면서 심한 사투리로 다그쳤다.
나는 지금도 삼천배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지만 그 뜻을 묻지도 물을 겨를도 없이 오기 찬 마음으로 당돌하게도 ‘예’하고 대답하였고, 그것은 그날 밤 새벽부터 장장 열두시간에 걸쳐 아침 점심 다 거르고 물만 마시면서 치러진 일생일대의 전투였다. 밤새도록 독려해 주셨던 인홍스님의 자애로움에 다시 한 번 경배를 드린다. 오후 3시경 빈 창자에다 가눌 수 없는 몸으로 기어가다시피 요사채에 들러 점심공양을 하는데 비구스님들만이 있는 백련암의 식단과 음식맛은 불문가지. 그러나 그날의 점심공양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실로 꿀맛 그대로였고 그것은 시장이 반찬이라는 옛말이 실감나고 지금도 나의 식생활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소임을 마친 내 마음은 무척이나 기뻤고 가슴도 뿌듯했다.
그런 벅찬 마음으로 스님께 인사를 드렸을 때 스님께서는 말 없이 칭찬을 주셨고, 손수 ‘삼현三玄’이라는 두 글자의 불명과 ‘이 뭣꼬’라는 화두를 주시면서 “삼현이란 부르기 쉽고 외우기 쉽고 쓰기도 쉬운기라.” 하시면서 소탈하게 웃으시던 그 순간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로부터 30년, 스님 열반으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이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철 스님! 저는 지금도 이 불명을 저의 아호로 쓰면서 스님을 흠모하고 저의 집에 모시고 있는 스님의 존영 앞에 합장드리며 재가불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 기억하십니까? 1993년 11월 4일 도하 신문방송들이 큰스님의 입적이라는 비보를 대서특필로 앞다투어 보도하고 행적을 추적 보도함으로써 온 국민은 미처 몰랐던 큰스님을 알게 되었고 끝없는 사랑과 슬픔과 존경을 보내면서 한 시대의 정신적인 지주요, 성인이었다고 입을 모았지 않았습니까?
무소유의 대명사요, 근검절약의 표상이셨던 큰스님! 어린이들의 친구요 천진하기까지 하셨던 큰스님! 삼천배로 통하시며 소탈하면서도 너무나 엄격하셨던 큰스님!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는 누구나 다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 큰스님께서 걸어오신 법랍 58년! 한국불교의 재정립을 위한 그 숱한 고행의 족적과 사상과 철학에 대해서는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저의 무지를 안타깝게 생각할 뿐입니다. 큰스님! 스님의 길고도 긴 수행생활과 조계종정으로서의 처신과 그 일화는 경이롭고, 범인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들이었다고만 생각합니다. 큰스님께서는 가야산으로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감투와 돈 보따리는 가야산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순수한 인간만 찾아오라 하셨지요?
스님! 요즘 세상은 실로 물질만능주의 시대며 인간상실의 시대입니다. 정말로 혼돈의 세월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흉악한 범죄가 난무하여 인륜이 무너지고 생명경시 풍조 또한 만연합니다.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자포자기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진 자들이 그것을 더 많이 더 오래 가지려 발버둥치고 이를 갖지 못한 자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질만능이요, 권력만능이요, 인간상실의 시대입니다.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의 갈등 속에서 사회평화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 시대의 정신적인 지주셨고 성인이셨던 큰스님!
이 절박하고도 혼돈한 인간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부대중에게 자기를 바로 볼 수 있고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큰스님의 열반 후 다비식까지 퇴설당에 모셔졌던 스님의 법구 앞에서나 혹은 영결식장에 모여 오열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스님의 가피를 내려주십시요.
그때 그날 가야산은 죽도록 붉게 물들어 있었고 하늘도 무심치 않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야산 인근 도로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오는 추모객들의 행렬로 메워졌고 차량통제로 수 많은 사람들이 수십리 길을 종종걸음을 재촉하는 일이 일어났지요. 거기에는 종파도 없었고, 높은 자도 낮은 자도, 가진 자도 갖지 못한 자도 없는 오직 스님의 열반을 애도하는 사람들만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그 수가 무려 삼십만이라 했습니다.
큰스님! 스님께서는 시방삼세를 자유자재로 드나드시며 늘 우리들 곁에 계시리라 믿습니다.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무서운 눈초리로 혹은 소탈한 웃음으로 무지한 이 중생들을 지켜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그 유명한 법어를 남기시고 열반에 드신 지 벌써 10년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스님! 십년이 아니라 백년 천년인들 변하겠습니까?
스님은 영원하십니다.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