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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향곡·청담·자운 큰스님을 모시고 살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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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2003년 10월 260호
새끼 사자 한 마리가 눈이 멀었다
도의 길에 있어 스승과 도반은 거의 절대적인 존재다.
‘공부의 반은 도반이 시켜준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며 한 길을 가는 도반은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공부해가는 필요한 존재다.
봉암사의 대중은 서로에게 그런 도반이요, 선지식이요, 스승으로 존재했다.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은 서로의 공부를 탁마해준 우정 깊은 도반이었다.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면서 월내 묘관음사에 있던 향곡 스님을 불렀고,
향곡 스님은 흔쾌히 달려와 함께 결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봉암사에 객들이 많이 와 있던 어느 날이었다.
향곡 스님이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왔다갔다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성철 스님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듯 하더니,
마침 객승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성철 스님의 멱살을 잡고 나왔다.
온 대중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을 하고 있는데,
향곡 스님이 성철 스님을 대문 밖으로 끌어내서 문을 잠가버렸다.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 묻고 답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기 며칠 전, 대중방에서 아침공양이 끝나고 죽비를 치기 전, 향곡 스님이 문득 말했었다.
“봉암사에 새끼 사자 한 마리가 있는데, 눈이 멀었소.”
그리곤 벽력 같은 할喝을 한 일이 있은 후였다.
당시 6년 동안 장좌불와를 하며 정진을 거듭하고 있던 성철 노장님의 진노는 대단했다.
문이 잠긴 밖에서 서성이며 욕을 해대는데, 평생 듣도 보지도 못한 소리였다.
성철 스님은 탑전, 가시덩굴이 깔려 있는 가시밭을
한 시간 동안 왔다갔다하면서 계속 욕을 퍼부었다.
성질이 맹렬해 맨발에 가시가 박혀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모른 채, 한 시간쯤 지났을 것이다.
대문짝이 와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철 노장님이 커다란 돌멩이로 대문을 내리친 것이다.
그때서야 향곡 스님이 나가 대문을 열었는데, 곧 비명 소리와 함께 향곡 스님의 발등에 피가 터졌다.
성철 스님이 대문을 내리쳤던 돌멩이를 들어
다시 한 번 대문을 내리치는 순간 대문을 열던 향곡 스님의 발등으로 돌멩이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두 분이 철 스님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눈을 뜨지 못했으니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는 두 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참, 그렇게도 궁금했어요.
살며시 봉창 옆으로 가서 듣고 싶은데, 발각되면 박살이 날까봐 근접도 못하고 말았지요.”
한참을 두런두런 무슨 얘기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이 함께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날, 향곡 스님이 했던 한 마디 말은 이러했다.
“사자새끼가 눈을 떴다.”
그날 성철 스님은 ‘허허허’, 헛웃음을 쳐가며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손뼉을 쳐댔다.
서로의 공부를 경책하고 탁마해주는 보기 드문 장엄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시절, ‘그런 선지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더 오래, ‘되게’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훗날, 혼자 공부하면서 생각이 올바른 선지식들과 함께 공부할 그런 회상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청담, 봄바람처럼 따뜻했던 선지식
성철 스님보다 십 년이나 연상이었던
청담 스님의 성철 스님에 대한 존경과 믿음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당시 ‘생불生佛’이라 불렸던 청담 스님은 대중들과 함께 있는 가운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철 스님은 석가의 화현이다. 나는 세세생생 철 수좌와 함께 공부하고 싶다.”
그런 얘기를 드러내 놓고 할 만큼 철 스님에 대한 청담 스님의 신뢰는 깊고 대단했다.
우정이 철벽과도 같았던 두 스님은 그 누구보다 이론적으로 잘 통했다.
언젠가, 대승사에 함께 살 때, 아침 공양을 하고 버드나뭇가지로 양치를 하면서
두 스님이 얘기를 시작하는 것을 보았는데,
점심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함께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나는,
내 스스로 말이 많진 않지만 그런 도반을 가진 두 선지식이 부러웠다.
도의 길을 가는 수행자에게 도반이 없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청담 스님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나는,
지금도 대중들을 따뜻이 보살피고 점잖았던 청담 스님을 잊지 못한다.
어른이라 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던, 부드럽고 겸손한 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결사가 해체될 때까지 봉암사에 남아 수좌들과 함께 정진했던 인욕보살이었다.
성철 스님이 질풍노도와도 같은 격렬함으로, 때론 된서리같은 차가움으로 후학들을 접했다면,
청담 스님은 새싹을 틔워주는 봄바람과 같은 따뜻함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나역시 나이들어 상좌들에게 시봉을 받고 있는 요즘 생각하면,
후학들을 사랑으로 살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성철 스님처럼 그렇게 대단하게 스승 노릇을 하기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청담 스님처럼 그리도 따뜻하게 선지식 역할을 하기도 진정 어려운 일이었다.

탁발이야기, 공동묘지 곁에서 자운 스님과 함께
봉암사에 살면서 첫해, 시월 보름 동안거 결제를 해놓고 탁발을 하러 나갔다.
한 번 나가면, 며칠에서 보름 정도 걸리는 탁발은 봉암사에 사는 대중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규칙의 하나였다.
두세 명씩 짝을 지어 탁발을 하러 나갔는데, 나는 자운 스님과 함께 갔다.
가까운 동네에서부터 멀리 괴산, 수안보 등 충청도 지방을 다녔다.
집집이 들러 염불을 해주고 나면 쌀들을 가지고 나와 걸망에 부어주곤 했다.
탁발을 하다가 시장기가 돌면 점심 기미가 있는 곳에 가서 점심을 청했다.
그러면 마당가에 어사또 밥상을 차려주듯 상을 내오고, 우리는 그것을 얻어먹곤 했다.
대전에서 처음 탁발을 했을 땐 얼굴이 후끈거려 염불은커녕 고개도 못 들었지만,
하루이틀 지나니까 바로 익숙해져서 마치 오랫동안 해온 것처럼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일정 말엽, 너나없이 먹고 살기 어려운 때였으나, 동냥하러 다니는 스님들을 그리 박대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걸식사상을 실현해보자는 뜻에서
탁발을 나선 것이었기 때문에 동냥을 다니다가 가난한 집을 보면,
그곳에 동냥한 쌀을 맡겼다가 짐짓 찾지 않고 동네를 나오기도 했다.
이 동네 저 동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동냥을 하는 일은 하심下心하지 않으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종일 찬밥 한 덩이 얻어먹고 돌아다니면서
염불 한자락을 해주고 동냥받은 쌀을 걸머지고 다니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저녁의 잠자리도 불편했다. 동네 사랑방에서 주로 잤는데,
촌사람들이 저녁을 먹고나면, 사랑방으로 와서 대나무 자리를 깔고 앉아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만들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한 여나믄 명이 종이에 싼 담배를 피우고 나면,
방 안이 마치 굴뚝에 연기 피어오르듯 연기로 자욱했다.
그런 곳에서 잠을 자려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자운 스님이 나를 당신 뒤에서 자라고 해놓곤
당신은 촌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받아주고 이런저런 말을 해주곤 했다.
자운 스님은 따뜻하고 자상한, 자비스러운 분이었다.
아침을 먹고 사랑방을 나서면 자운 스님은 언제나 나에게
먼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나선 당신은 다른 길로 가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 어스름에 공동묘지 앞에서 자운 스님과 만나 얻은 돈은 잘 세어서
바랑에 넣어두고 쌀을 한 곳에 모아 놓았다. 얻어온 떡과 과일을 펴놓고 먹었다.
그리곤 자운 스님과 나란히 앉아 이를 잡았다.
내의 속을 하얀 서캐까지 깔아놓으며 종횡무진하는 이를 잡지 않으면
스멀스멀 온 몸이 가려워 밤에 잠을 자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랑방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자면서 옮아온 이였다.
천성적으로 빌어먹을 거지팔자였는지 몸이 시원찮다가도 탁발하러 나가면 몸이 좋아졌다.
나 역시 그 시절 탁발하던 즐거움을 이러했다.
비구란, ‘걸식乞食하는 자’란 뜻이 아닌가.
한 번 나오면 열흘쯤 걸리는 탁발이 나에게 즐거운 수행이었다.